문학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영화론

아래는 일본의 대표적인 근대 문학가인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예찬”이란 수필집에서 영화에 관련된 부분만 발췌 및 요약후에 내 나름의 단평을 달아본 것이다. 볼드체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주장이고, 그 아래는 나의 단평이다. 참고로 모두 약 100년전의 주장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염두하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화론

영화는 연극을 압도할것이다. 미래는 대중예술의 시대가 될것인데, 영화는 대중예술로 크게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순수 예술적인 방향으로도 발전될 여지가 있다. 

: 이 주장이 제기된 100년전은 아직 영화가 본격적인 예술 분야로 인정받지 않았던 시기이며 단순한 눈요기 거리 정도로 여겨지던 때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영화가 가진 위상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다. 다니자키의 혜안을 엿볼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는 기록성과 영원성이 가장 큰 장점이다. 연극은 일시적이고 휘발적이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영화의 영원성이 영화배우의 자질을 높이게 될것이다. 연극 배우는 자신의 연기가 임시적일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영화배우는 영원히 역사에 남는 연기를 남긴다는 의식을 가질것이다. 이점이 영화배우의 품질을 높이게 된다. 

:다니자키는 영화가 매체에 기록되고 복사되어 보급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현대에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크게 의식이 되지 않는 장점이나, 그가 살던 시대에는 이점이 엄청난 혁명이었을것이다. 이 장점에서 그는 독특한 주장을 이끌어 내는데, 연극배우와 달리 영화배우는 자신의 연기를 역사에 남길수 있으므로 더욱 정성들여 연기에 임하게 될것이며 이것이 영화에 좀더 자질이 높은 배우들을 몰리게 만들 것이라 추론한다. 그는 “명예욕”을 예술작품의 품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에는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명예욕 보다는 오히려 “돈”을 들어야 할것같다.

흑백이 컬러보다 더 좋다. 키네마 컬러는 별로다. 흑백은 예술적 결정화를 가져온다. 영화는 소리와 색이 없어야 한다. 시에서 형상(이미지)이 없듯이 말이다. 

:영화에서 색과 소리가 없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전체적으로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절제미의 추구를 연상케 한다. 여기서 예술적 결정화(crystallizing)는 아마도 대상의 핵심만을 추출해서 보존한다는 그런 의미인듯 싶다. 다니자키는 흑백화에서 군더더기를 제외하고 핵심만 뽑아낸다는 느낌을 받은 듯 싶다. 그런데 그의 위 주장은 100년전이라는 시대상을 반드시 고려하고 들어야 한다. 그가 말하는 키네마컬러는 초창기 컬러영화기술인데 매우 조악한 수준이었다. 그가 현대의 컬러영화를 보았다면 과연 위와 똑같은 주장을 했을까? 참고로 이와 관련하여 내가 쓴 흑백영화 가이드 글을 첨부해둔다 : 링크 

영화는 회화와 같이 구도를 표현할수 있다. 이것이 연극과의 차이점이다.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점은 언제나 같다. 

:영화가 구도와 시점을 다양하게 구성할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것 같다. 전체적으로 다니자키는 영화의 미장센이 갖는 미덕은 확실히 인식했는데, 다만 그의 인식이 몽타주 기법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쉽게 말해 그의 영화에 대한 인식은 정적인것에 머물러 있다.

클로우즈업은 연극에서는 할수 없는 대단한 효과이다. 인물의 얼굴을 클로우즈업으로 자세히 바라볼때 뭔지 모를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평소에 주의깊게 살피지 않았던 사물을 자세히 살필때의 생소함, 낯설음 등을 느끼게 되는데 클로우즈업이 그러한 효과를 유도한다고 보는 것이다.

영화는 사실주의로 가야한다. 연극처럼 과장되고 형식적이어서는 안된다.

: 이 부분도 100년전 주장이라는 것에 유념해야 할것 같다. 영화시대의 극초창기라 그의 주장에서 영화를 일단 연극으로 부터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자주 보인다. 현대에는 이미 영화로 주도권이 넘어간 상태이므로 오히려 여유로운 자세에서 연극적 요소를 영화에 도입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에릭 로메르 감독은 연극이나 문학적 요소에 대해 너그러운 편이다.

세계적인 연극배우는 일본에서 나올수 없지만 세계적인 영화배우는 일본에서 나올수 있을것이다. 

영화의 국제성과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이 주장은 어느정도 사실인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왜 이런 것인지 그는 분명히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 이 주장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애국주의적인 배경을 깔고 있어 약간 의외로 보인다.

소설과 영화는 다른것이다. 형편없는 소설도 영화화되었을때 탁월한 경우도 가능하다. 

이 주장도 사실로 보이는데, 아마도 스토리에 “영상적합성”이란 특질이 있는듯 싶다.

영구한 순수예술성을 갖지 못하는 애매모호한 작품보다 차라리 확실하게 저속한게 더 낫다. 이러한 작품들은 황당무계하고 엉터리라도 판타지를 느끼게 해준다. 

키치적인 B급 무비에 대해 관대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는 순수예술을 더 높게 평가하고는 있지만 대중적인 작품들도 그것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다.

영화는 백일몽 같은것이다. 인간은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꿈을 꾸고 싶어하는데 영화는 기계로 만드는 꿈과 같은 것이다. 

이 주장을 문학가 마광수가 똑같이 한 것을 보았는데, 마광수의 주장의 원래 출처가 다니자키였다는것을 이제야 알았다. 두 사람 모두 성 예술에 심취했던 작가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추천 영화 리스트

the broken coin (1915)
the exploits elaine (1914)

:줄거리 자체는 저속하나 영화로 만들어져 흥미롭게 된 작품들

Quo Vadis (1913)
Antony and Cleopatra (1908)

:스케일이 큰 웅장한 수작들

Der Student von prag(1913)
Der Golem (1915)

:영구한 가치가 있는 작품들

Zigomar (1911)

:저속하고 황당무계해서 오히려 좋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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