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노벨상 수상자들은 관례적으로 노벨 위원회가 마련한 공식적인 자리에서 강연을 하게 되어있는데, 이 글은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의 노벨상 강연에 대해 요약하고 비평한 것입니다. 주로 “사상가로서의 한강”과 “창작자로서의 한강”, 이렇게 두 측면에 주목하여 검토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웃기게도 저는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시점에서 한강의 작품을 접해본적이 전혀 없는데, 차후에 읽어볼 요량으로 그녀의 작품 두 세권을 생각해두기는 했습니다. 강연의 내용이 충분히 자세하고 친절하므로 글에 큰 문제는 없을것이라 생각이 되지만, 어쨌든 이같은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염두해두시고 혹시나 글에 문제를 발견하신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상가로서의 한강
한강은 강연의 서두에서 자신이 8살때 일기장에 기록한 생각에 대해 말한다.
“사랑은 우리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
“사랑은 뛰는 가슴속 나의 심장”
그리고 한강은 이 두 문장을 강연의 말미에 다시 언급하여 강연자체를 대구법을 사용한 문학 작품처럼 만든다. 이는 한강이 말한 위 문장들이 강연의 시작과 끝을 관통한 것처럼, 어린시절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생의 끝에 이르기까지 이 문장들이 그녀의 온 생애를 관통하리라는 암시이다.
한강의 사상적 측면은 크게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것의 해결책으로서의 “사랑”으로 구분지어볼수 있겠다. 그녀는 “광주”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개별적 폭력의 사례에서 보편적인 폭력의 개념을 이끌어내고 인간이 어떻게 폭력과 그에 대항하는 고결함을 동시에 가질수 있는것인지, 이 모순에 대해 괴로워하고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어린시절의 사랑에 대한 착상으로부터 이 의문에 대한 잠정적 해결책을 찾는데, 금실과 같은 사랑으로 서로를 연결하여 이들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것이다.
젊은시절에 한강은 “현재가 과거를 도울수 있는가? 산자가 죽은자를 구할수 있는가?”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문학이 지나간 과거를 위로하는 차원에 주목했지만 이내 그녀의 물음들은 거꾸로, “과거가 현재를 도울수 있는지, 죽은자가 산자를 구할수 있는지”로 전복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의 문학적 목표는 분명히 현실참여적이고 적극적인 것으로서 그녀의 말속에는 어떠한 “강인함”이 숨어있다.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인데, 이렇게 과거의 아픔과 사랑을 다루는 예술들이 “나약한 센티멘탈리즘”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반면 한강에게서는 고통에 당당히 직면하는 강인한 태도를 엿볼수 있는데 이 강인함은 “사랑”에 기반한 것이고, 아래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이 사랑은 한강 본인이 가진 “탁월함(excellence)”에 기인하는 것이다.
결국 한강의 문학이 가진 정신 혹은 목표는 “금실의 역할을 하는 언어의 문학으로 모든이들을 연결시켜 자신이 느낀 사랑과 고통의 감각을 온전히 느끼게 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담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사상이 가진 한계 혹은 문제점은 무엇일까?
먼저, 한강의 문제의식과 해결책은 모두 그녀의 기질적인 “탁월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는 보통 사람들은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점이 지적될수 있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강과 같이 자신이 겪지 않은 사건에 대해 수년간 고통스럽게 첨착하며 괴로워하고 한강과 같이 “보편적 인류”에 대하여 사랑의 감정을 발휘할수가 없다. 이들은 모두 분명히 남다른 탁월한 능력에 속하는 것인데 유사한 사례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경우를 들수 있겠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신문에 인쇄된 전쟁 사망자 숫자만 보고도 끝없는 슬픔의 감정을 느낀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1], 이것은 “추상적 일반 기호”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이끌어내는 특수한 능력에 속하는 것이다. 아마도 한강 역시 이러한 탁월성을 갖춘듯한데,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남다른 감수성을 타인은 가질수 없다는 것을 생생히 실감하지는 못할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해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의도하고 있는 “사랑”이란 해결책이 그녀가 뜻한바대로 동작될지는 미지수이다.
둘째로 언어라는 수단을 가진 문학 자체가 가진 한계인데, 한강이 재학했던 연세대학교의 국문학과 교수(시기가 겹치는 듯하지만 재학 시절 직접 수강을 했는지는 불명이다) 마광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2].
“문학은 절대로 인류를 구원하거나 세계의 정치적 평화를 실현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할수 없다. 문학이 철학이나 신학보다 더 형이상학적이고 포괄적인 진리를 지향하는 차원 높은 예술형태라는 이론에 나는 동의할수 없다.”
마광수 교수는 문학이 가진 현실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인데, 문학이 지나치게 “사회 정치적 참여”라는 한계점을 두드리다보면 어떤 위선이나 왜곡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모든 사회 참여적 예술인들이 어느정도는 귀담아 둘 필요가 있는 지적으로 보인다.
창작자로서의 한강
이제 조금은 기술적인 측면일수도 있는 한강의 창작술과 관련한 내용을 살펴보겠다. 그녀는 여러 문학 장르중에서 “장편소설”을 선호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녀의 창작 목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사회참여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시나 단편의 글보다는 장문의 소설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한강은 전형적인 “문제해결식” 창작에 기반하여 글을 쓰고 있다. 어떤 문제를 발견하고 — 한강의 경우는 인간의 폭력성과 고귀함이라는 모순 —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기간 탐구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설정하여 풀어나가는 것이다. 한가지 돋보이는 점은 그녀가 이른바 “과학철학적 탐구”의 양식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녀가 의식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창작과정은 다분히 과학의 발달사와 닮아 있다. 즉,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가설을 설정하고 이 가설을 깨는 새로운 가설을 다시 만들고 하는 것의 반복이라는 과학의 절차를 소설 창작에 있어서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3]. 따라서 그녀의 소설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며 완결된 답이라는 끝이 없는 셈이 된다. 이점도 확실히 과학철학적이다 [3]. 그리고 강연에서 이 과정을 설명하며 그녀는 “하나의 소설에서 자신이 변형되고 다시 새로 출발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변형”이라는 단어 선택이 매우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이런 문장에서는 “변화”라는 인간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본인 스스로를 마치 객관적 사물처럼 느끼게 해주는 변형이라는 단어를 택한것도 아마 자신의 창작과정이 과학적이라는 늬앙스를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강의 창작술에 있어서 또다른 특징은 그녀가 “감각적(신체적) 사고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4]. 이는 어떤 추상적 관념을 감각적으로 치환하여 인식하고 자신이 느낀 이 감정 자체가 독자에게 그대로 소환(recall)될수 있도록 언어로 기술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그녀는 삶을 “따뜻함”으로, 죽음을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을 정도의 “차가움”으로 치환하여 인식한다. 사실 이같은 사고 방식 역시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없는 일종의 특수한 능력으로서 그녀의 기질적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밖에 그녀는 한 작품을 3~7년씩 장기간에 걸쳐 쓴다고 하는데, 이는 충분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창작이 이루어지기 때문으로 보이며 본인이 꾼 꿈을 창작의 동기로 연결시키는 기술, 제목에도 의미와 주제를 담는 기술등도 사용하는 듯 보인다.
참고문헌 및 미주
[1] 인생은 뜨겁게, 버트런드 러셀 저, 송은경 역
[2] 시학, 마광수 저
[3] 과학철학입문, 루돌프 카르납 저, 윤용택 역
[4] 이같은 신체적 사고방식 혹은 신체적 소통은 영화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의 착상과 유사하다. 그의 작품 “해피아워”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신체적 소통에 대해 다루고 있다. 류스케 감독도 인류애와 소통을 주된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한강과 유사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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