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의 인연

몇년전 어느 겨울의 일이다. 나는 정호연 닮은 어느 여성분하고 잘 안되서 상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일본 미야자키행 비행기표가 싸게 나와 기분전환도 할겸 홀로 여행을 떠났다.

미야자키는 해안과 접경하고 있는 작은 도시인데 대략 우리나라의 강원도 비슷하다. 내가 묶었던 숙소는 산 언덕위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1인실이었다. 숙소에서 기차역까지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걸을만한 거리였다. 숙소 주인은 서핑이 취미이고 멋진 포르쉐를 타고 다니는 청년이었는데 내가 차가 멋지다고 하니 대출받아 샀다고 수줍게 웃는 순박한 면도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숙소를 다시 찾아보니 없어졌던데 혹시 코로나의 파국을 이기지 못하고 대출금에 허덕이다 파산한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된다.

나는 여행 마지막 전날 아침 숙소에서 나와 시내에서 놀다가 오후 늦게쯤 조그마한 꼬마 기차를 탔다. 이런 일본 시골 동네 기차를 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무인역이라 당췌 표는 어디서 사는건지 알수가 없어서 여행 내내 나는 얼시구나 그냥 꽁짜로 탔다. 이 마지막 날도 꽁짜로 탔고 기차는 곧 칙칙폭폭 출발했다. 그런데 정말 칙칙폭폭 소리가 난 것은 물론 아니다. 전기로 가는거라 실제로 별 소리는 안나고 그냥 분위기 좋으라고 한 말이다.

어느새 역에 도착했고 내리려던 순간 누가 갑자기 등뒤에서 나를 붙잡는 것이다. 뒤돌아 보니 기관사였는데 나보고 뭐라뭐라 삿대질을 하며 화를 낸다. 나는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데, 딱 한단어 “니혼고”만 알아들을수 있었다. 아마도 일본어도 모르는 놈이 무임승차를 하다니 너 같은 외국놈은 감히 대일본제국에 발을 들여놀 자격이 없다 뭐 이런 욕을 한게 아닐까 싶은데 자세한 것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속으로는 사람이 살다보면 꽁짜로 탈수도 있지 좀 화가났지만(적반하장임) 이국땅에서 감방에 가면 큰일나겠다 싶어서 잠자코 눈치를 살폈다. 기관사가 분이 풀렸는지 실컷 화를 낸 후 그냥 용서해주는 분위기라서 슬며시 기차에서 내렸다. 휴 다행이다 싶었는데 진짜 문제는 이때 부터 시작되었다.

티격태격하느라 어느새 시간이 저녁이 되어 점점 날이 컴컴해지고 금방 칠흙같은 밤이 되었다. 숙소까지 가는 길은 해안가 도로였는데 낮에는 아무 문제없던 길이 밤에는 가로등도 없어 컴컴하고 옆은 수십미터 절벽아래로 시커먼 파도가 철석철석 치고 있었다. 이따금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차들때문에 정말로 차에 치여 죽을까 겁이 덜컥 났다.

조심스래 가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는데 마침 십여가구 정도가 사는 조그만 마을이 하나 보여서 무작정 그리로 갔다. 한집 한집 도와달라고 정중하게 영어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는데 분명히 집안에 있으면서도 아예 문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야박한 일본 시골민심에 욕을하며 마지막 집의 문을 두드렸는데 인상좋은 할아버지 한분이 나오신다. 할아버지는 잠깐만 기다리라며 방안의 누구를 부르신다.

알고보니 이집은 시아버지, 젊은 부부, 유치원생 남자아이가 사는 집이었는데 영어를 할줄아는 며느리를 부른거였다. 이 젊은 새댁이 정말로 나에게는 천사 같았는데, 나를 도와줘서 천사같은게 아니고 실제 얼굴이 굉장히 아름다우셔서 천사처럼 느껴졌다. 나는 남편 네 놈이 나는 참 부럽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핸드폰 지도 앱을 열고 여차저차 설명을 하니 부부는 흥쾌히 차로 데려다 준다고 하였고 나는 그날 무사히 숙소로 돌아올수 있었다.

나는 그날밤 잠이 들면서 너무도 고마운 마음에 내일 아침 일찍 그 집으로 과자를 사가지고 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가야겠다 다짐했다. 그런데 다음날 피곤했는지 늦잠을 자서 인사를 할 시간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내내 찜찜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구글 지도로 주소를 찾을수 있으니 당시에 유행했던 한국의 특산물들, 이를테면 해녀복 입은 라이언 인형같은것을 고맙다는 편지와 함께 보내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일이 바빠서 어느새 그 계획은 잊혀졌고 문득 수년이 지난 오늘 그때 기억이 떠올라 이 글을 쓰고 있는것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 미야자키에 다시 가게 된다면, 그때는 꼭 그 집에 들러볼 생각이다. 물론 나는 두번다시 내가 미야자키로 여행갈일이 아마 없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이렇게 인간이란 화장실 들어갈때와 나올때가 다른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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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응답

  1. 보통 여행이 아니셨군요

    1. 네 비범했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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