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이를 위한 한줄 소개 :
사람도 동물도 모두 행복한 세상을 위하여
감상평
본 작품은 아기돼지 윌버와 거미 샬롯의 관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포스터에서는 돼지와 농장 주인의 딸(다코타 패닝 분)이 부각되어 있지만 초반에 윌버를 구한 것 빼고는 딸이 하는 역할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곰곰히 생각해보면 알수 있겠지만 윌버는 단지 먹고 자고 한 것 밖에 없다는 사실도 재미있는 점이다. 윌버는 사실상 샬롯의 노력만으로 구한거나 마찬가지다. 이것을 스토리상의 문제라고 한다면 문제라 볼수도 있는 지점이다.
이 영화는 동명의 아동용 동화를 원작으로 한 것인데, 이 원작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충실히 따르고 있다. 20세기 초반에 씌여진 동화에 동물권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니 시대를 앞서갔다고 볼수도 있겠는데, 원작자인 엘윈 브룩스 화이트는 영작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the elements of style”이란 책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이하에서는 영화와 동화의 내용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주로 이 원작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반기독교적 종평등주의를 주장하는 것일까?
본 작품이 동물도 사람과 같이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일견 “종평등주의”를 주장하고 있는것이 아닌가가 쟁점이 된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것은 인간을 특별한 지위에 놓는 기독교 사상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원작자가 살던 시기의 미국은 — 사실 지금도 그러하지만 — 청교도 주의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렇게 불순(?)하다고 의심받을수 있는 사상을 공개적으로 썼다는 것은 기독교사상과 관련지어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다.
내가 조사해본바에 의하면 출간 당시에 특별한 저항을 받았던거 같지는 않다. 오히려 뒤늦은 2006년에 캔자스주에서 학부모단체의 항의를 받아 어린이 추천도서에서 제외된 사례가 있었는데, 말을 하는 특별한 능력은 신이 인간에게만 주신 것이라 교육상 해롭다는 이유였다. 우리나라의 실정은 어떤지 조사해보았는데, 특별히 기독교 단체의 항의를 받은 사례는 없었고 오히려 여러 교회나 종교단체에서 이 책을 어린이 권장도서로 선정해서 교육을 하는 다소 의외의 사례만을 찾을수 있었다. 추측컨데, 출간 당시의 미국의 기독교 단체나, 우리나라의 기독교 단체나, 특별히 진보적인 입장에서 이 작품을 순순히 받아들였던것은 아니고 작품속에 깔려있는 위와 같은 쟁점 자체를 아얘 발견하지 못했던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 작품이 기독교 교리와 상치되는 완전한 종평등주의를 주장하는 작품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원리를 은밀하게 전제하고 진행된다. 작품속에서 정신과 의사는 거미가 만드는 거미줄을 “기적(미라클)”이라고 부른다. 이 기적이라는 단어는 여러번 등장하는데, 원작자는 아마도 모든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신 앞에서의 기적이라고 보았던것 같다. 신 앞에서는 모두가 기적이니 사람뿐만 아니라 돼지도 거미도 모두 소중한 것이라는게 원작자의 논리이다.
윌버를 표현하는 마지막 단어는 “겸손함”이다. 이 단어 역시 대단히 기독교적인것이다. 신 앞에서의 겸손함을 성경은 자주 강조를 한다. 본 작품에서 겸손함이란 단어는 신을 향한 윌버의 겸손함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인간(관객)을 향해 겸손함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원작자의 종교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는데, 기독교인이었으나 집단으로서의 교회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는 자료를 발견할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속에서의 교회 목사는 은근히 윌버의 기적을 평가절하하는 태도를 보이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딸의 부모도 처음에는 기적을 인정하지 않고 딸의 장난이겠거니 한다.
요약하자면, 원작자는 독특한 종교관을 가졌고 자연과 동물을 평소에 대단히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이같은 성향이 어우러져 결과적으로 “인간과 동물 모두 신의 귀중한 피조물이니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어찌보면 약간은 나이브할수 있는 결론을 낸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진보적인, 현대의 종평등주의나 동물권을 주장하는 작품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네 이름이 뭐니? — 이름으로 특정된 돼지
이 작품은 보편적 동물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동물의 권리에 대해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사실 어떤 정교한 철학 논문으로서 작성된 것이 아니고 어린이용 동화로서 가볍게 쓰여진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애매모호해 졌다고 말하는게 보다 정확하겠다.
이 애매모호함을 조금 구체화 시켜 풀어본다면 본 작품의 세계속에서 동물들은 신 앞에서의 기적이라는 어찌보면 형식적인 명분뿐인 권리를 갖게 된다. 여전히 최소한의 존중은 받겠지만 소는 소고기가 될것이고 돼지는 삼겹살로 구워질것이다. 물론 원작자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성스러움을 거미 샬롯과 관련된 스토리로 멋지게 풀고는 있지만 이 성스러운 순환은 야생의 동물에게만 온전히 인정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축들은 이러한 순환에 따라 살아가지는 못한다. 결국, 윌버가 받는 대우는 일종의 “특권”이 되고, 이 특권에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그것이 바로 “이름 붙이기”이다.
작품속에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동물은 돼지 윌버, 거미 샬롯, 쥐 템플턴 뿐이다. 거위 한마리가 구시라는 이름을 가진것으로 나오긴 하지만 이는 일반명사 거위(구스)와 다를것이 없어 제대로된 이름이라 보기 힘들다. 윌버는 동물들에게 이름을 묻고 때로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 “이름”은 집합으로 일반화된 가축에 불과한 동물을 특정하여, 집합에서 끄집어 내어 비로소 주체성을 가진 어엿한 개인으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특정된 동물은 위에서 말한 “특권”의 전제조건을 갖춘 동물이 되는 것이다.
포르쿠스 루덴스 — 놀이하는 돼지
윌버가 농장에 처음온날 동물들에게 함께 놀자고 조른다. 그러나 동물들은 “논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것 처럼 보인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의 본질을 놀이로 보아 인간을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 불렀는데, 이처럼 놀이는 인간성을 나타내는 고유의 징표가 될수 있다. 윌버가 놀이를 할줄아는 점은 돼지인 윌버에게 인간성을 부여하는 하나의 장치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좋을까? — 종평등주의와 채식주의
모든 동물은 평등하며 따라서 고기를 먹는 행위는 비윤리적이라는 주장이 있을수 있다. 이 주장의 정당성을 검토하려면 먼저 윤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부터 선결되어야 한다. 허나 이 문제는 나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불가능한 문제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상식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쾌락주의적인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이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겠다.
역사적으로 사회가 진보함에따라 권리의 대상자가 확장되는 경향을 띄어왔다. 노예가 해방되고, 투표권이 특별한 시민들에서 일반 시민으로 그리고 여성으로 인정범위가 넓어진 것들이 그 예가 된다. 따라서 언젠가는 고기를 먹는 것이 사회적으로 야만적인 일로 받아들여질 날이 온다는 것을 예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날은 어떠한 도덕적 개혁따위가 아니라 과학의 발달로 완벽한 인공합성육이 값싸게 보급되면서 찾아올것이다. 아무래도 맛있는 고기의 유혹을 인간이 이기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동물 해방의 날”이 오기전까지가 문제인데, 그동안은 사육환경을 개선하여 짧은 사육기간만이라도 가축들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종평등주의와 같은 거창한 사상에 입각 해서든, 아니면 자신이 키우는 애완동물의 귀여움에 영향을 받았든, 여하한 누군가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 선언한다면 격려해주는것이 합리적이다. 종간을 넘어 우주 전체의 고통의 총량을 감소시키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 육식원리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개는 먹으면 안되고 소는 먹어도 되는거냐?
돼지는 죽이면 안된다면서 파리는 왜 죽이냐?
이는 모든것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인데, 모든것은 점진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쉽게 말해 “돼지는 행복하고, 파리는 불행한 세상”이 “돼지도 파리도 모두 불행한 세상”보다 훨씬 좋은 세상인 것이다.
동물권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면
호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가 이 분야의 가장 권위자인것 같다. 그의 책 <동물해방>은 이미 동물윤리학의 고전이 되었다. 동물문제와 관련하여 좀더 심도깊게 알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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