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창작자를 위한 철학 3 | 버트런드 러셀과 좋은 삶 하편

지난 이야기

영화 창작자를 위한 철학 1 | 일반인에서 영화 창작자로
영화 창작자를 위한 철학 2 | 버트런드 러셀과 좋은 삶 상편

 

안대로 눈을 가리고 미로 빠져나오기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곤합니다. 이럴 때 흔히 들을수 있는 말이 “너가 진정 원하는 것을 해라”, “너의 마음이 외치는 소리에 귀를 귀울여봐”, “남이 원하는 것이 아닌 너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 ” 등등의 이른바 “마이 웨이” 철학입니다. 정작 이런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 자신은 딱히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사는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이런말을 들으면 우리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무언가 잘 될것만 같은 느낌 아닌 느낌이 들면서 왠지 고마워서 고기사주고 싶고 그렇습니다. 때로는 이런 조언을 직접 실천한 사람들이 책도 내곤하더군요. “서른살 대기업을 때려치고 나를 찾아 해외여행을 갔습니다” 대충 이런 제목의 에세이집들이 시중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류의 조언은 딱히 쓸모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에게 위와 같은 조언을 하는 사람을 보면 지금 제 정신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러한 상황은 안대로 눈을 가린 선수가 복잡한 미로를 빠져나오는 상황에 비유할수 있습니다.

이 선수가 미로앞에 서서 출발준비를 하며 고민합니다. 롱패딩을 입을까 숏패딩을 입을까. 그래 미로속을 뛰다보면 더울테니까 숏패딩이 좋겠다. 바지는 뭘 입을까. 청바지 보다는 트레이닝 복이 좋겠지. 신발은 나이키를 신을까 아디다스를 신을까. 아니다. 비가 올지도 모르니 운동화보다는 새로산 고어텍스 등산화를 신는게 좋겠다.

그런데 어짜피 이런 고민들은 모두 무의미 합니다. 눈을 안대로 가렸기 때문에 운동화를 신든 등산화를 신든 빠져나오지 못하는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죠. 물론 똑같이 미로에 갖힐거라면 이왕이면 발이 뽀송뽀송하게 방수 등산화가 더 낫기는 할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것은 전혀 아니란 소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전 시간에 말한 “선천적 매트릭스”에 갖힌 상태에서는 위와 같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자”와 같은 류의 고민들은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정작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건지 온갖 오류에 휩싸여서 도대체가 판단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더 무서운것은 이렇게 자신이 판단이 안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판단이 안됩니다.😂

이런식으로는 마음이 쿵쾅쿵쾅 너무 좋아서 해봤는데 정작 나중에는 왠지 여기가 아닌가벼 하고 실망하고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단 이러한 장래진로 문제 뿐만 아니라 여러종류의 판단상황에서 이 선천적 매트릭스는 심각한 오류를 만들고 결과적으로 우리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역시 이 경우도 이 매트릭스 때문에 곤경에 빠졌다는 것을 정작 당사자는 잘 모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가능한 최대한 빨리 이 매트릭스에서 탈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나머지 잔여 인생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건강하게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저는 본 연재글 시리즈에서 영화창작이 이 작업에 도움을 줄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이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지난 시간에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명언 하나를 가져왔었습니다. 이제 이 명언에 대해 좀더 알아보겠습니다.

좋은 삶과 매트릭스 탈출하기

 

좋은 삶이란, 사랑에 고무되고 지성에 인도되는 삶이다.   – 버트런드 러셀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명언대로 살면 저절로 자동으로 “선천적 매트릭스”세계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참 쉽죠?😆 위에서 러셀이 말한 좋은 삶을 살다보면 시간이 지나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러면서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온 자기 자신을 발견할수 있을겁니다. 굉장히 평범하고, 어떻게 보면 식상한 방법이죠.

그런데 저와 다르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이들은 매트릭스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비범하고 특별난 방법(물론 주장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방법이 아주 평범하고 쉽다고 말하지만)을 제시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석가모니입니다. 석가모니는 특유의 명상법과 대단히 난해한 불교철학이 어우러진 고도의 자기관찰법을 매트릭스 탈출법으로 제시하시는데, 저는 이거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 못 따라한다고 봅니다 (심지어 전문 수도승들 조차 저는 과연 이것을 그들이 제대로 따라하고 있는걸까 의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이분은 그림 그리는 밥 아저씨 마냥 이거 사실 어려운거 아니라고, 이거 참쉽죠? 이럽니다.😆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제가 제시하는 방법은 산에 올라가지 않고 도시에서도 할수 있고 무엇보다 대단히 상식적이고 쉽습니다. 이제 위 명언을 분석해보겠습니다.

이성주의 vs 반이성주의

러셀의 위 명언이 나온 것은 대략 20세기 초반쯤입니다. 이때는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아주 어수선한때였는데, 이 직전까지만해도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이성으로 열심히 과학 기술을 연마하면 종국적으로 진리에 다다르고 천하태평한 유토피아에서 살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즉, 시간의 문제이지 어쨌든 결국에는 이성으로 세상 만사 문제를 해결할수 있을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두차례 세계대전으로 깨지게 됩니다. 심지어 굳게 믿었던 이성으로 만들어진 핵폭탄같은 첨단 무기들이 오히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아! 이성에 의존하면 안되는구나! 하고서 거꾸로 반이성주의로 향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철학과 예술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게 되는데 여러분들이 흔히 들어본적이 있는 초현실주의라던지 아방가르드 전위예술이라던지 포스트모더니즘같은것들이 대강 말해서 이런 새로운 흐름위에 있는 것이지요. 철학계에서도 객관적인 이성중심적 방법이 아닌 주관주의적인 방법을 쓰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아얘 과학 자체에 대해 적대적이고 거부하는 태도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기서 러셀은 위와 같은 반이성주의적 흐름에 대해 반대를 합니다. 즉, 이러한 방법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고 보는것이지요. 러셀의 주장을 쉽게 말하자면, “반이성주의는 부엌칼에 손을 베었다고 부엌에 있는 칼을 몽땅 버리는 셈이다. 조심해서 쓰던지 안전장치같은것을 달면 되지 않겠는가? “정도로 표현할수 있겠습니다. 러셀의 명언의 뒷부분 “지성에 인도받는”이 바로 이성주의를 뜻합니다.

여러분은 이 명언을 처음 보았을때 아마도 “사랑이랑 지성이랑 골고루 잘 버무려서 살아라” 정도로 느껴졌을겁니다. 다시 말해 사랑과 지성이 비등비등하게 놓여진것으로 보였을겁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지성을 매우 강조해서 무게중심을 지성에 놓은 발언입니다. 단, 러셀이 사랑을 지성보다 안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평소의 자연인 러셀은 사랑을 인생의 아주 중요한 요소로 보았으나 이 발언은 철학적 발언으로서 당대 철학계를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지성을 강조했을뿐입니다. 정리하자면 러셀의 위 명언은 사랑이란 감정을 마치 자동차에서의 연료처럼 원동력으로 삼고, 지성을 마치 자동차에서의 핸들처럼 잘 조향해가며 인생을 살으라는 말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이 지성만 있다면 인생이 맥아리가 없이 무미건조하겠지요. 따라서 사랑은 인생을 활활 태워줄 연료같은 것이 됩니다. 그리고 사랑 또는 감정이 연료가 아니라 핸들이 되버린다면, 다시말해 감정에 따라 조정받는 인생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러셀은 생각했던것입니다.

지성이란 무엇인가?

사실 본 연재글 시리즈 전체도 러셀의 명언 뒷부분, 바로 “지성”의 함양을 목표로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이 지성이 굉장히 애매한 단어라는 점입니다. 사람에 따라 이 지성이란것이 천차만별로 달라질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점성술사는 점성술을 최고의 지성이라고 말할것이고, 풍수지리업자는 풍수지리학이 지성의 결정체라고 말할것입니다. 대체 어떤 지성에 따르라고 러셀이 말하고 있는것인지 애매합니다.

여기서 저는 지성을 사실상 사고방식과 유사하다고 보고, 지성대신 “사고방식”이란 용어를 사용하겠습니다. 그리고 사고방식을 다시 제 임의로 세가지로 나누겠습니다. 바로 과학적 사고방식, 철학적 사고방식, 예술적 사고방식이 그것입니다. 이 세 사고방식은 그 내용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점이 절대로 미리 각각의 사고방식을 상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즉, 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보는 순간 여러분 대부분은 머릿속에서 인공위성이 날아다니고 첨단 스마트폰과 로봇이 와따가따 할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과학적 사고방식과 그런 상상과는 거의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 이들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러셀이 강조한 사고방식은 무엇인지만 짧게 이야기하죠.

러셀은 대체로 “과학적 사고방식”을 바람직하게 봅니다. 다시말해 러셀의 위 명언은 “사랑에 고무되고 과학적 사고방식의 인도를 받는 삶”이라고 바꾸어도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러분은 저에게 이렇게 물을것입니다. “아니 그럼 당신은 아마추어 과학자가 되라고 우리를 부추겨야지 왜 영화창작자가 되라고 말하는 것이냐?’

여기에 대한 제 대답은 첫째로, 제가 영화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 유튜브를 운영했다면 다른 글을 썼겠지요.😂 둘째는 러셀은 과학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것이지 나머지 철학과 예술을 버려버리라고 말한적이 없습니다. 이 분은 전부 다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예술(물론 영화를 포함해서)에 심취하는것이 과학에도 도움을 줄수 있습니다. 즉, 예술로서의 영화를 사랑하면 이것이 간접적으로 과학적 사고방식도 부양할수 있고, 러셀의 명언 앞부분 “사랑”이란 감정도 강화시킬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아래에서 설명하도록 하지요.

예술적 사고방식을 최고로 여길수는 없는가?

제 생각에 여러분 중 상당수는 러셀의 위 사상에 불만을 가지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대부분은 제 영화 예술 유튜브 구독자일테니까요.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바로 예술적 사고 방식을 최고로 놓아 러셀의 명언 뒷부분을 “예술적 사고방식의 인도를 받는”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중에 많은 분들은 실제로 이렇게 살고 계실 것입니다. 즉, 예술적 감상이 인생의 지침, 나침반인 것이죠.

물론 여러분이 이렇게 바꾸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애당초 저는 어떤 특정한 사고 방식을 여러분에게 설득하기 위해 위 명언을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과학적, 철학적, 예술적 어느 사고방식을 이 명언에 넣느냐가 지금 이 연재글의 목적과 관련해서는 크게 중요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본 연재글이 진행되면서 차차 밝혀지겠습니다.

 

다음 글로 가기>>>

Posted in

Reply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