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와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에 대한 단평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90년대 멜로 영화 라인의 끝자락에 서있는데, 그래서그런지 지난 세대 신파 행렬의 하나로서 조금은 저평가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식상할수도 있는 전형적인 멜로 드라마적 주제를 사실적이고 절제있게 표현하여 큰 감동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를 대표할만한 수작임에 분명하다.

이 영화는 황동규 시인이 쓴 <즐거운 편지>라는 시에 모티브 받아 만들어진것인데, 실제로 제작 초기에는 영화의 제목을 즐거운 편지로 정했으나 <편지>라는 영화가 먼저 개봉되어 할수 없이 현재의 제목으로 바꾼것이다. 여기서 이 시를 잠깐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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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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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이 시를 좋아하지는 않는데, 여기에는 뭐랄까, 낭만주의가 가진 작위성이랄까? 아무튼 내 눈에는 이 시가 전혀 진솔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화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 같이 느껴진다. 시의 주제가 어쩌면 순박할지도 모를 “기다림의 자세”라 그런것은 아니다.  이러한 낭만적인 자세도 얼마든지 진솔하게 쓴 글들이 많이 있다. 조사해보니 이 시는 황동규 시인이 고3때 쓴 것이라 한다. 그럼 그렇지 했는데, 이 시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학생이 가지기 힘든 자세에 대해 너무 태연스럽게 말하고 있다.
모티브가 된 원작 시 보다는 오히려 영화의 엔딩에서 한석규가 읇는 짧은 시가 더 좋다. 이 시를 잠깐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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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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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는(정확히는 영화를 포함한 작품 전체) 황동규의 시에서 느껴지는 작위성이 없고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이 시의 화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고, 곧 죽을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수 있을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속 한석규는 왜 심은하에게 자신의 죽음을 말하지 않고 피해다녔을까? 그 이유는 위 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의 사랑을 영원히 지속시키고자 함이다. 진행중인 사랑이 미완된채로 세상을 떠나서 자신과 상대방의 마음에 이 사랑을 종결없이 영원히 남기고 싶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같은 발상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서 또다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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