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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씨의 지적 허영심 긍정론에 대한 비판(외부 사이트)
들어가며
예전에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동진씨가 주장한 이른바 “허영심에 기반한 독서법”에 대해 비판의 글을 쓴적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추가적인 논점들이 발견되어 두개의 글을 더 쓸참인데, 첫째는 니체의 어떤 글이 이동진씨의 독서법을 지지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검토이고, 둘째는 이동진씨 독서법의 무용함을 좀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실증해보는 것에 대한 글이다. 이 글에서는 첫째의 니체의 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을것인데, 들어가기에 앞서서 이동진씨의 주장에 대한 대안없는 비판만 하고 있는것이 아니냐는 재비판이 나에게 제기될수 있을것 같아 대안책에 대한 이야기도 짧게 언급해야 할것 같다. 나는 이동진씨의 허영심 기반 독서법 보다는 “문제해결을 위한 독서법”을 제안하고 싶은데, 이에 대한 글도 작성하려다가 이미 기존에 쓴 글과 주제면에서 유사하여 그 예전 글로 갈음하려 한다.
문제해결을 위한 독서법과 관련한 글 : 링크
니체의 문제가 되는 글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마치 이동진씨의 독서법을 지지하는것처럼 보이는 글을 발견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글은 이동진씨의 주장을 지지하지는 못하는데, 먼저 니체의 원문부터 살펴보자 [1]. 번호표시와 볼드체 처리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내가 한것이다.
성공은 동기를 신성하게 한다 — (1)추진력이 되는 동기가 이기주의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될때도, (2)미덕에 이르는 길을 꺼려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동기들은 비속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불린다. 좋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어떤 미덕으로, (3)예를 들어 체념, 의무에의 충실, 질서, 절약, 절도, 중용 등의 길로 고무한다면 그것이 어떤 수식어로 불리든 우리는 그 동기에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그것이 촉구하는 목표가 일단 달성되면 (4)달성된 미덕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게 하고 심리적으로 쾌감을 줌으로써 우리 행동의 배후에 있는 여러 동기를 계속 고귀하게 만들어 간다. 그리고 우리가 나중에 같은 행위를 행할때는 이미 우리를 재촉했던 것과 같은 조잡한 동기로 행동하지 않게 된다. -중략-
니체는 (1)에서처럼 형편없는 동기에 의한 행동이라도 그것이 (2)와 같이 미덕에 이르는 길이라면 그 행동을 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동진씨의 주장인 “허영심을 위해 독서하는 것도 좋다”가 니체의 주장과 동일한것이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될수 있다. 그러나 (3)의 예들을 통해 보면 니체가 말하는 “미덕에 이르는 길”에서 목표가 되는 미덕은 분명하고 명확한 것이며, 이것에 이르는 수단인 길과 미덕과의 견련성이 충분히 강하여 사실상 미덕과 길이 동일한 것에 이를 정도가 되어야 할것이다. 허나 독서행위의 목표가 되는 미덕은 불명확한 것이며, 이 불명확한 미덕과 독서행위와의 견련성도 그다지 강하다고 볼수 없다. 쉽게 말해 단순히 글 자체를 읽는 행위가 니체가 든 예들인 의무에의 충실, 절도, 중용과 같은 명확한 미덕으로 곧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위 글을 이동진씨의 주장을 지지하는 근거로 삼기는 어려운것이다. 아울러 니체의 글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4)에서처럼 사실 니체는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설명하면서 굉장히 신비주의적으로 두리뭉실하게 표현하고 넘어가고 있다. 대체 달성된 미덕이 어떻게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게 하여 그것이 다른 동기들을 고귀하게 만든다는 것인지 인과관계의 설명이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저, 강두식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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