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철학자 질 들뢰즈와의 인터뷰를 담은 DVD세트인 L’Abécédaire de Gilles Deleuze(1995)의 C comme Culute편에 수록된 영상을 나름으로 간단히 정리한 것입니다. 제가 들뢰즈의 사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내용이 부실한데, 혹시 내용과 관련하여 잘못된 부분이나 첨언할 부분이 있으신 분들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일본의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가 쓴 어떤책에서 들뢰즈의 발언 일부를 주석에서 언급한 것을 확인하려고 본 영상을 본것인데, 이 부분은 영상의 13분24초쯤에서 들뢰즈가 “영화를 보는 이유”에 대해 말하는 장면입니다.
지식인과 관련하여
들뢰즈는 단순히 방대한 지식을 암기하고 있는 자를 지식인이라 칭한다. 들뢰즈 본인은 그러한 종류의 지식인이 아니며, 이들을 볼때 부럽지는 않고 단지 놀랍기만 하다고 평가 절하한다.
말하기와 글쓰기
들뢰즈는 말하기와 글쓰기에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며 양자중 글쓰기를 더 선호한다고 말한다.
만남에 관하여
들뢰즈는 만남을 사람과 사람사이가 아니라 사람과 사물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정의한다. 이 만남을 위하여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인데, 이것은 후술할 만남의 필요조건으로서의 “감동”을 전제한듯한 발언으로 보인다.
그는 사람 사이의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아니며 이들은 필연적으로 파국에 이른다는 말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납득이 잘 안간다. 그는 지식인 그룹과의 교류를 좋아하지 않는것으로 보이며, 사람이 주는 매력을 좋아하지 사람자체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여기서 “사람 자체”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의문이고, 그가 왜 사람과의 만남을 평가절하하는지도 궁금하다. 이를 위해서는 그의 사상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가 필요할것 같다.
철학함의 목적
들뢰즈는 “나는 철학을 통해 철학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것이 나의 관심”이라고 말한다. 일종의 자기전복적인 사상을 보여준다.
재해석과 재창조, 그리고 발견
들뢰즈는 본인이 쓴 라이프니츠에 관한 책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기존 문헌을 색다르게 재해석하여 재창조하는 방식으로 쓰여진것이다. 이는 후술할 “발견”의 작업이기도 하다.
연극과 영화
들뢰즈는 격식을 차려서 관람하여야 하는 극장에서의 연극보다는 간편하게 갈수 있는 영화관을 더 선호한다고 말한다. 연극은 우리시대와의 접촉이 끊겼다고까지 표현한다.
문화생활의 목적
들뢰즈는 영화를 보는것을 비롯하여 자신이 행하는 모든 문화생활의 목적을 “일이 아니라 그냥 뭔가를 찾고 있는 것뿐”이라고 밝히며,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것이 나를 감동시키는가? 라고 궁금해한다”고 말한다. 영상의 번역문에서는 그 의미가 잘 살지 않는데, 들뢰즈의 발언은 능동적으로 감동을 찾는것이기보다는 수동적으로 “기다리는것”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1]. 그리고 여기서의 “감동”은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감동이라기 보다는, 하이데거가 말한 앎의 조건으로서의 “감동”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책의 세가지 위기
들뢰즈가 말하는 책의 세가지 위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저널리스트가 쓰는 신문기사같은 조잡한 책들이다. 둘째는 글은 사적인것이라는 관념의 유행이다. 이는 누구나 글을 쓸수 있고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소설이 된다는 발상을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예전에 쓴 “사밀함의 객관화”에 대한 글 참조 : 링크) 개인적으로 볼때 이같은 유행은 문학은 보편성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책의 실제 고객이 “유통업자”라는 점이다. 이는 텔레비전의 실제 고객이 시청자가 아니라 광고주라는 점과 비슷한것인데, 자본주의적인 측면에서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로 던지는 예술
들뢰즈는 “우주로 화살을 쏘고 그것을 미래의 누군가가 주워 창조를 일으킨다”는 니체의 발언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와 비슷한 발언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도 나온다 [2]. 개인적으로 야심찬 예술가들이라면 가져야할 좋은 마음가짐이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1]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고쿠분 고이치로 저, 최재혁 역
[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 마르셀 프루스트 저, 김창석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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