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EBZINE — 창간호

편집자의 말

이번 창간호의 두 기사는 공교롭게도 하나의 연관점에서 서로 이어지는 글입니다.

“즐거운 편지”라는 기사의 제목은 엊그제 제가 보았던 황동규 시인의 동명의 시에서 따온것입니다. 사실 내용은 별로 즐겁지 않지만 이 즐거운 편지라는 제목이 이쁘고 마음에 들어 가져와 보았습니다.

“위대한 문학을 만드는 방법”은 제가 독자로서 위대한 문학작품을 읽으며 발견한 한가지 사실에 대해 간단히 쓴 글입니다.

 


즐거운 편지

한나님의 글을 읽고 — 원본 글 : 링크

 

한나님께.

 

먼저 재미없는 제 글을 평소에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한나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야할 것 같습니다.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나님의 글을 읽고 한나님의 마음을 한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제게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감정을 양쪽으로 극단적으로 증폭시키면 한나님하고 비슷해질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잘 모르겠더군요. 꽤나 불편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정확히는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아마 그 누구도 한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나님은 본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걸까요? 저는 분명히 그렇지 않을것이라 생각합니다. 한나님은 문제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모르고 저를 비롯한 타인은 너무 멀어서 제대로 알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위로하는 재주가 별로 없어서 이 글에서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할 것인데, 다행히도 제가 한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몰라도 문제해결에 관하여 이야기하는데에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대게 이런 문제가 생긴경우 사람들은 한나님처럼 과거에 침전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원인이 과거에 있기때문에 마치 외과수술을 하듯이 그 과거를 어떻게 잘 도려내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부지불식간에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 프로이트를 비롯하여 이러한 착안을 바탕으로 치료를 하려는 심리학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아이디어는 신통치 않을 것이라 믿는데, 이것은 마치 자동차 뺑소니를 당해 뼈가 부러진 사람이 무슨차가 몇월 몇시 언제 자기를 치었는지 운전자는 누군지 찾아서 뼈를 도로 붙여놓으려는 시도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환자가 안다고 해서 뼈가 원상복구 되지 않듯이 저는 한나님이 과거로 부터 무언가 대단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과거에 몰두하는 자세는 여러모로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대부분의 경우 문제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병과 더불어 태연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위 말은 옛날옛적 갈리아니라는 사제가 에피네라는 사람하고 주고받은 서신에 나오는 말입니다 (참고로 이 두사람 간에 한말은 저것 하나만 멋지고 딱히 쓸만한 자료는 없으니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겠습니다). 저는 한나님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면 위와 같은 결과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즉, 문제가 한나님 머릿속에 그대로 존재하기는 하는데, 그것이 인생의 방해가 되지 않으며 시시하게 느껴지는 상태가 되는겁니다. 여기서 한나님은 한가지 불만이 들수 있겠는데, 지금 이렇게나 고통스러운데 이 문제를 그대로 떠안고 어떻게 태연하게 살아간다는 말인지 태평한 소리처럼 들리겠지요? 아마도 한나님은 문제 부분만 싹 영구히 삭제하고 싶으실텐데, 이제 왜 위와 같은 결론으로 충분한지와 결론으로 가는 방법에 대해 좀더 알아보도록 하죠. 물론 위 문장을 벽에 붙여놓고 외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한다고해서 위와 같은 결론이 되는것은 전혀 아닙니다.

여기 7살짜리 여자아이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이 아이가 자신이 아끼는 티니핑 장난감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마 이 아이는 온 세상을 잃은 기분이라 엄청 슬플겁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성인이 보기에 티니핑 장난감 따위를 잃어버린 사건이 그닥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왜 이 어린 아이가 슬픈일이 우리에게는 아무일도 아닐까요? 아주 쉬운 문제인데, 한나님과 저의 정신수준이 이 어린아이보다 월등히 뛰어나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가상의 어린아이와 똑같은 문제, 즉 티니핑 장난감이 없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 문제없이 태연하게 살고 있습니다. 티니핑 장난감이 있던 없던 우리에게는 아무일도 아닌것이죠 (혹시 티니핑 장난감을 갖고 계시다면 미안합니다). 이와 유사한 원리로 한나님의 문제도 그냥 그대로 간직한채 아무 문제없이 사는것이 불가능한일은 아니고, 그 방법은 역시 티니핑 사례와 똑같이 한나님이 정신적으로 “비약적인 도약”을 하면 됩니다. 즉, 지금보다 정신수준이 월등히 탁월해져서 문제를 압도해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여기서 또다른 문제가 생기는데, 바로 이 “정신적 도약”이 도대체 실감이 안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대략 만 19세를 넘기면 자신이 대강 완숙해졌다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즉, 정신적 성장은 이미 끝났다고 여기고 일종의 자만심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똑똑하다는 사람일수록 더합니다. 아마도 한나님 또한 겉으로는 어떻게 말할지 몰라도 무의식적으로는 자신의 정신적 성장이 이미 끝났다고 전제할겁니다. 한나님의 글에도 역시 그런 모습이 보이는데,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은 중대하고 만성적인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현재 머리로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하나 아둥바둥 그 머리의 틀안에서만 맴돌며 애를 씁니다. 이렇게 하면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으므로 전제가 되는 머리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이 정신적 도약 부분을 실감하기 위해서 이렇게 합시다. 현재의 한나님의 정신수준보다 100배 위로 껑충 도약하는것도 가능합니다. 이렇게 정량적으로 표현하는것이 사실 어불성설이지만 딱히 문제될것은 없을것 같습니다. 요점은 아무런 제한없이 정신이 도약할 여지의 빈공간이 현재 한나님 머리위로 한참은 크고 넓게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렇게 도약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문제가 되는데 이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냥 “학습”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학습은 우리가 초중고교, 심지어 대부분의 대학에서 하는 학습과는 그 방식과 대상면에서 많이 다릅니다. 먼저 대상에 대해 말하자면 단도직입적으로 “고전”이라고 못을 박아두겠습니다. 고전 이외에 그 어떤 책도 그것을 아무리 많이 읽어봐야 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종류의 “정신적 도약”은 어렵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여기서 말하는 고전이라함은 “무슨무슨대학교 필독서 100” 이런 진부한 리스트들에 있는 그 책들이 맞습니다.

여기서 또다시 문제가 생기는데(문제가 정말 계속 생기는군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말이 너무나 진부하게 들려서 도대체가 무슨 효과가 있을지 믿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고전의 가치는 현재 한나님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상상할수 없을만큼 높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여기서 일일히 설명하지는 않겠고, 쉽게 다시 숫자를 도입해서 현재 한나님이 생각하는 가치의 1000배라고 간주하시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것입니다. 고전이 당연히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 고전 독서만으로도 충분히 비약적인 도약이 가능합니다.

저는 위에서 말한 류의, 소위 제도권에서 정하는 모범 혹은 베스트 리스트 따위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인데,  너무나 신기하게도 고전책 리스트들은 아무리 하찮은 기관일지라도 기가 막히게 정확히 뽑아내더군요. 곰곰히 생각해보았는데, 이것은 인간들이 뽑은 것이 아니라 고전 스스로 그 가치를 드러내서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고전이외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일단 지금은 지나치게 귀를 기울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여기의 평범한 사람에 저도 포함됩니다. “불멸의 고전 작가” 이외의 모든 이들은 지금 제가 말하는 평범한 사람에 해당됩니다. 아무리 유명한 하버드 대학 교수님도, 히치콕 감독님도, 천만 유튜버도 다음 세기가 증명하기 전까지는 모두 평범한 사람입니다. 저를 비롯한 이러한 평범한 사람들의 시시한 목소리를 듣고서 혼란에 빠지며 시간을 낭비해선 안됩니다. 고전으로 검증된 위대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우선 듣는것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지금 제 말이 약간은 거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권위주의자나 엘리트주의자가 하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이러한 오해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역시 이데올로기의 하나이고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진실을 왜곡하는 측면을 당연히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시골 노인의 연륜이라느니 평범한 우리 이웃이 가진 생활의 지혜 따위를 믿지 않습니다. 직접 확인해보기도 했지만 대부분 구멍이 숭숭 뚤린 어설픈 소리들을 낭만적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다만 평범한 사람들이 진리를 직접 말하지는 못하지만 본인도 모르게 스스로 진리를 드러내기는 합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도 원론적으로는 무시해서는 안되고 중요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참 나중에 고려할 문제일뿐입니다.

학습의 대상은 대략 이러하고 이제 학습의 방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나님은 이렇게 상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전 심리학책, 그것도 제목이 “무슨무슨 정신적 문제를 치료하는 방법”을 사서 그것이 제시하는 방법 열가지를 잘 숙지하는 것. 이런 방식을 상상하실지 모르겠는데 제가 말하고자하는 방법은 이렇게 직접적인 것이 아닙니다.

“고전”속에 숨어있는 한나님 본인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숨어있는 것을 찾는것이므로 사실 좀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고전은 심리는 물론 심리와 전혀 상관없는 모든 분야를 어우릅니다 (사실 여러가지 이유로 심리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중요한 것을 발견할 확률이 더 높습니다). 과학, 철학, 문학, 예술, 종교, 심지어 공학, 기술, 수학 등에서도 발견할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수학, 통계학, 심지어 아예 책도 아닌, 스팸 필터링 시스템이나 전자렌지의 매커니즘에서도 저의 모습을 발견한적이 있습니다.

제가 방금 발견한 저의 모습 한가지를 이해의 편의를 위해 알려드리지요. 저는 요새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에서 지드는 자신의 저술 의도를 밝힙니다. 그런데 이 저술 의도와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편지글의 의도가 정확히 동일하다는 것을 방금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드의 글만 보고는 실감이 안갔던 내용이 우연히 발생된 편지글 작성이라는 행동과 결합하여 생생하게 이해가 가게 된것입니다. 결국 지드의 위 고전에서 저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고 아울러 이 책의 다른 부분에 대한 이해도 월등히 높아지게 됩니다.

이렇게 발견을 하게 되면 제 머리는 일종의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다양한 감동들이 계속해서 누적이되면 어느순간 실제로 변화, 즉 도약을 하게 되는데 이 도약은 대게 여러 단계의 계단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변화가 없다고 실망하면 안되고 계속해서 꾸준히 해야 합니다. 이런 단순하고 촌스러운 방법으로 어떻게 문제가 해결될지 의심스러울지 모르겠는데, 다시말하지만 고전의 영향력은 한나님의 상상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사실 책 읽는다고 부작용같은 것은 전혀 없으니 설사 제가 말한 효과가 없더라도 속는셈치고라도 한번 해볼만할겁니다:) 다음 링크는 제가 예전에 썼던 고전 학습법에 관한 글인데, 한나님의 상황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이 편지글의 취지를 전제하고 작성된 것입니다. 참고해도 좋을듯 싶군요 : 링크

지금까지 말한 방법이 제가 독창적으로 개발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저는 아주 우연히, 소 뒷걸음치다 쥐밟은 격으로 이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 것인데, 알고보니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고전”을 쓴 “위대한 작가”들 상당수가 이 방법을 거쳐왔더군요. 이 방법을 거친후에 정신적으로 도약한 후 고전을 쓴 것입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것이 제가 말한 방법은 단 두부류의 사람들만 실천이 가능합니다. 한나님과 같이 해결해야할 중대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선천적으로 엄청난 호기심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만이 위 작업을 할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위대한 작가들은 이 두가지 동기를 모두 갖기도 합니다. 그럼 두배 더 도약하겠지요?

제 생각에는 위 두 동기중 어느 하나도 가지지 않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위와 같이 지루하고 재미없고 아무런 공감이 가지 않는 작업을 결코 성공적으로 수행할수가 없을것 같습니다. 이들의 고전 학습은 대게 “교양”차원에서 이루어지는데 “무슨 무슨 주의” 따위의 전문 용어를 머리로만 암기해서 남에게 뽐낸다던지, 벽돌책 완독같은 성취감 갖기 프로젝트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기가 힘듭니다. 이들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온몸으로 학습을 한 사람간에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이를 가질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주어진 조건을 선용할지어다” 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내게 우연한 기회에 떨어진 조건을, 그것이 설사 악조건이어도 최대한 유익한 방향으로 바꾸라는 말입니다. 저는 한나님이 본인의 문제를 남들이 쉽게 할수 없는 일, 즉 비약적인 도약을 하는 기회로서 완전히 뒤집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과거가 억울하거나 손해라는 생각이 없어질테고, 지금은 믿기 힘들겠지만 어쩌면 “오히려 이게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이제 몇가지 당부드리고 싶은 말씀을 간단히 드리고 끝낼까 합니다.

먼저, 위 글이 굉장히 문학적 내지는 철학적 분위기로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대단히 과학적인 습성이 든 사람입니다. 저는 약물적 치료 수단에 대해 전혀 반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니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저는 먼 미래에는 의학이 우리가 이야기했던 문제를 모두 완벽하게 정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더 이상 위와 같이 어려운 작업은 필요없고 아주 간편하게 알약 하나로 일거에 해결이 될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살아생전에는 이같은 꿈이 실현되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약물 기술도 충분한 의미가 있는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약물은 치료에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물 이외의 치료 수단은 모두 의지가 개입됩니다. 이 과정중에 필연적으로 자아에 몰입이 됩니다. 이 자아 몰입은 여러가지 문제를 낳아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약물은 이러한 문제가 없습니다. 물과 함께 삼키면 약물이 알아서 작용하는 것이므로 본인에 대해 숙고한다던지 하는 작업이 필요없는것이지요. 제가 제안한 방법은 약물적 치료와 아무런 모순없이 동시에 진행이 가능한 것이니 오해 없길 바랍니다. 요컨데 쓸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 하세요.

다음으로 한나님께서 말씀하신 “닥터”라는 것은 아마 오지 않을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나님이 상상하시는 모습으로 오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올겁니다. 희망을 가질때 절대로 어떤 구체적이고 명확한 모습을 그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그 모습 그대로 희망은 오지 않으며 오지 않을것을 기다리는것처럼 사람을 진빠지게 하는것은 없습니다. 희망을 가질때는 흐리멍텅하고 유연하고 불확정적이고 막연하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희망에 더 기쁘게 되니까요.

본 편지글의 내용에서 다룬 “학습”은 일종의 언어적인 학습만을 다룬것입니다. 당연히 “비언어적인 학습”도 있고 사실 이것이 본론입니다. 즉, 저는 정작 중요한 본론에 대해서는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서론만 잠깐 이야기한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님의 현 상황에서는 이 서론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서론이 끝나지 않으면 본론을 시도해도 제대로 동작이 안될겁니다. 그래도 본론에 대해 아예 건너뛰는것도 뭐하니 아주 간단히 한가지만 이야기 하자면, 저는 여러 비언어적인 학습들 중에서 운동을 권하겠습니다.

운동은 자신의 신체적 한계에 도달하는 종류의 것이 좋습니다. 뭘 할지 모르겠다면 그냥 밖에 나가 뛰세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제가 운동을 하라는 것은 흔히 이야기 되는 기분전환 목적이라던지 세로토닌이 분비된다던지 하는 차원이 전혀 아닙니다. 여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고 명백히 “학습”의 목적으로 제안하는 것입니다.

한나님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공감과 위로에 취약해지기가 쉽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정신적인 도약을 통해 이루어지지 공감과 위로는 임시적인 것일 뿐이고 자주 이 도약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공감과 위로는 타인이 주는것은 물론이고 본인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도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위에서 말한 고전 학습 과정에서 내 기분을 좋게 만드는 내용을 편향되게 받아들인다거나 임의로 그 뜻을 내 기분좋을대로 왜곡시키는 경우가 자주 생길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제가 제안한 고전 학습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명언 몇개를 외우고 하는 식이 아니고,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는 과정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내 마음과 상관없이, 설사 내 마음에 들지 않은 진실이라도 그것을 찾겠다”라고 하는 “차가운 과정”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것이 외양과 다르게 도리어 따뜻한 과정임이 느껴질것입니다.

끝으로 한가지 사실을 말씀드리면, 저는 본 글에서 중요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슬며시 피해가고 의도적으로 개략적인 내용만 전달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희망에 대한 이야기와 약간 유사합니다. 저는 마음만 먹는다면 한나님의 글 문장 하나하나에 밑줄을 긋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첨삭을 하고 어느 책의 몇페이지를 참고하라고 친절하고 자세히 알려줄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나님이 알아야 할 개념들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해서 정리해 드리는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본인이 직접 발견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략하고 넘어간 부분은 모두 한나님 본인이 해야할 일입니다. 그리고 애당초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글도 평범한 사람이 쓴 시시한 소리에 불과하므로 실제 상황에서는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유연하게 받아들이는것도 한나님 몫입니다. 혹시 관련해서 문의사항이 생긴다면 언제든 홈페이지 및 유튜브 댓글, 이메일(메일링 리스트가 발송되는 주소로 보내면 됩니다)등 편하신 방법으로 문의하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한나님의 링크된 글 이외에도 한나님의 다른 글들을 꼼꼼히 보았고 그속에서 한나님의 영리함과 용기를 발견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믿는 내용을 담아 한나님에게 최대한 도움이 될수 있는 방향으로 이 글을 작성했습니다. 아무쪼록 무심코 넘어가지 마시고 한번쯤 진지하게 고려해보신후 이 글을 문제해결의 디딤돌로 삼으셨으면 좋겠습니다.

 

Jyn드림.

 


위대한 문학을 만드는 방법

리아님의 글을 읽고 — 원본 글 : 링크

 

공교롭게도 본 기사와 이전의 “즐거운 편지”라는 제목의 글 상당부분이 중복된 주제를 담게되었다. 따라서 중복된 내용을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약만 한후에 중복되지 않는 부분만 좀더 자세히 설명하려고 한다.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밝힐것이 있는데, 나는 스스로 작가, 즉 글을 쓸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은 글을 읽는 사람, 즉 독자의 입장에서 관찰한 것을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 속에는 제대로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말하는 이들이 흔히 저지를수 있는 실수들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밝혀둔다.

내가 생각하기에 많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업은 “문제해결”로서 이루어지는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작가는 분야를 불문한다. 즉 과학, 수학, 공학 분야의 작가들도 일단 원론적으로 여기서 논하는 작가에 포함될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문학이나 철학 분야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들은 인생사의 어떤 중대한 문제를 가지고 있고 이 중대한 문제는 개인의 인생의 행로를 심각하게 방해하는 것인데, 심지어 이 문제는 자살을 유발하기도 한다.

실례로서 단테, 도스토예프스키, 마르셀 프루스트, 앙드레 지드의 경우를 잠시 살펴보자. 먼저 단테는 잘나가던 정치인 생활을 하다가 줄을 잘못서서 사실상 종교적으로 파문을 당하고 고향에서 쫒겨나 죽을때까지 영영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이 수십년간의 외지생활중에 첫사랑을 그리워하며 쓴 책이 바로 그의 대표작 <신곡>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일단 분위기부터가 고생스러운 러시아에서 태어나 유달리 강한 성욕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하고 정치범으로 붙잡혀 사형당하기 직전에 풀려나는 드라마틱한 경험도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평생 심기증(건강염려증)으로 고생을 했으며, 앙드레 지드는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과 모순되는 종교적 관념들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이들 모두의 작가활동은 자신이 가진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혹은 해결 그 자체로서 이루어진것이다. 때로는 해결을 다 끝내고 기쁨마음에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글을 쓰기도 하는데, 이것은 어린아이가 자신이 잘한 일을 기쁜마음에 하루종일 엄마에게 떠들어 대는 것과 유사한 심리인듯 하다.

나는 작가가 위에서 말한 “중대한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위대한 작가가 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즉, 이 중대한 문제라는 것이 작가에게 있어서는 어떤 한계 혹은 재능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 중대한 문제가 없는 그럭저럭 행복한 삶이 일반인에게는 축복이지만 작가에게는 저주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중대한 문제를 가지지 않은 작가들이 쓴 글을 읽어보면 어딘가 모르게 깊이가 얕고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 심심하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이들 글도 나름은 훌륭하지만 자신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쓴 위대한 작가들의 글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중대한 문제를 가지지 못한 “불행한 작가”들은 어찌해야 할까? 이대로 위대한 작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평범한 작가로 만족해야만 할까? 그러기는 너무 아쉬운 일이니 여기서 방법 한가지를 제안 하겠다. 그 방법이란 바로 “없는 문제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이니 문제를 그냥 만들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비루한 내 글보다는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관련해서 쓴 글을 보는것이 훨씬 낫겠다. 아래는 그의 글 원문이다.

***

비극을 쓰기 위해서는 비극을 느껴야 한다. 비극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저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피와 근육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 크러치는 그의 저서에서 여러 번 절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냉혹한 세상을 받아들이는 그의 영웅적 태도를 보고 감동한다. 그러나 크러치를 비롯한 대부분의 문필가들은 새로운 자극이 올때 옛 감정을 느끼는 방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을 냉혹하다고 보는 것이다.

분명 자극은 존재하지만 문필가 그룹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필가 그룹은 공동체의 삶과 생생한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 비극과 참된 행복이 전개될수 있을 만큼의 진지함과 깊이를 지니려면 공동체의 삶과 긴밀하게 접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세상에는 할만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 때문에 고민하는 모든 재능있는 젊은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충고하겠다.

글을 쓰려는 생각을 버려라. 그 대신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보라. 세상으로 나가라. 해적도 되어보고, 보르네오의 왕도 되어 보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보라. 기본적인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생활을 해라.

예전에 지식인이었던 사람들은 몇년동안 이렇게 생활하고 나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기에 도달하면 글을 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

“의도적”으로 세상밖으로나가 “모험적인 경험”을 하라는 충고인데, 실제로 이같은 방법을 실천한 작가들이 많이 있다. 먼저 앙드레 지드는 앞서 말했듯이 이미 “중대한 문제”를 가진 분이었지만 문제 해결을 겸해서 스스로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고향인 파리를 떠나 아프리카로 간다. 여기서 그는 본인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성공하고 콩고에서는 인종차별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구하여 이에 대한 책도 쓴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실 “중대한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나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젊은 나이에 사업을 벌여 그럭저럭 성공을 하기도 했다. 그는 대체적으로 평탄하고 즐거운 인생을 산 사람이다. 따라서 어찌보면 작가로서 한계가 있는 사람인데, 이를 그도 자각을 하였던것인지 젊어서 부터 정말 뻔질나게 유럽, 미국 등등 여기저기 돌아다니신다.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열심히 달리기 운동을 하시는데, 이 모든 것들이 언뜻보면 안락하게 해외 유람을 하는것 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사서 고생하며 창작의 양분을 만드는 행위로 생각된다. 러셀의 위 글과 동일한 취지인것이다.

예리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한가지 수상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렇다. 사실 처음에 말한 위대한 창작의 동기인 “중대한 문제”와 지금 말하고 있는 “스스로 만드는 문제”는 다른 종류의 것이며 둘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래도 우리는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니, 문제가 없는 불행한 작가들이여, 없는 문제를 최선을 다해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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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응답

  1. 안녕하세요! 한나입니다. 진 님이 써 주신 편지에서 전달되고자 하는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문장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명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문장은 위에 쓰인 글에서 힌트를 찾아 보며 퍼즐 맞추듯 진 님의 생각을 따라갔습니다. 이 글이 평범한 사람이 쓴 시시한 소리에 불과하다고 하셨지만 저에게는 중요합니다. 타인으로부터 필요한 진실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살면서 많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문장 하나하나 비 내리듯 밑줄 그어져서 참고 문헌까지 추천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크지만 말씀해 주신 것처럼 제가 스스로 깨달아야 함에 동의합니다. 🙂 다부지기 위한 여정이 되겠네요.

    글과 관련해서 궁금한 점들이 몇 가지 생겼는데, 짧게 요약하기 어려워서요. 조금 길더라도 이 댓글에서 물어봐도 좋을지, 메일로 보내드리는 게 나을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오바하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저의 마음을 상상해 보려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인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정말 큰 고마움인 것 같습니다.

    1. 네, 혹시 불쾌하지 않을지 염려가되어 안쓸려고 했다가 그냥 나름 정제해서 쓴것인데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메일로 하시는게 한나님께 좋을것 같으니 메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자동발송 메일에 주소가 있을테니 주소가 jins어쩌고로 시작하는게 맞는지 확인후 보내시면 됩니다.

      지금 다시보니 너무 혼자 알아서 하라고 내팽게친거 같기도한데ㅎㅎ, 대략적인 가이드 정도는 제시해드릴수 있습니다. 아무튼 궁금한거 있음 부담갖지 마시고 자유롭게 물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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