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EBZINE — 2호

편집자의 말

이번호에서는 들고양이님의 “비극과 희극에 대한 정의”를 비평하고 이같은 연구에 있어서 문제되는 편향과 인과관계에 대한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다음으로 잔잔님글을 읽고 명상에 대한 제 의견을 밝혀보았습니다.

 


연구에 있어서의 편향과 인과관계의 문제

들고양이님의 글을 읽고 — 원본 글 : 링크

 

들고양이님(이하 글쓴이라 지칭함)의 원본 글은 전자 음악가 “키라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희극과 비극의 정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참고로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가 아닌 글쓴이가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희극 — 관객과 등장인물이 느끼는 감정이 달라야 한다
비극 — 관객과 등장인물이 느끼는 감정이 같아야 한다

 

사실, 글쓴이의 정확한 표현은 비극의 정의 부분에서 “관객과 등장인물이 느끼는 감정이 일치하는 것”인데 전체글의 문맥상 위와 같이 강제성을 띈 의미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것 같다.

채플린의 코미디 영화를 보면 찰리 채플린이 넘어지고 괴로워하지만 관객인 우리는 즐겁다. 비극적인 드라마를 보자면 등장인물들이 울고 관객인 나도 울고 모두가 운다. 이처럼 글쓴이의 희극과 비극의 정의는 심플하면서도 그럴싸해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비극에서는 정말로 관객과 등장인물이 느끼는 감정이 같을까?

희극은 찾기가 보다 까다롭지만 비극에서는 글쓴이의 정의에 대한 반례를 쉽게 찾을수가 있다. 여기서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마지막 장면을 살펴보자.

여기서는 등장인물로 심은하와 한석규(목소리 출연)가 나온다. 이들 두명의 등장인물과 관객의 감정상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될수 있을것이다.

 

심은하 — 옛 추억을 떠올리며 살짝 웃는것으로 보아 대체적으로 한석규와의 인연을 좋은 추억으로서 기쁘게 간직하고 있다. 사진관을 떠나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후회나 미련같은 것은 없어보인다.

한석규 — 나레이션에서의 표현을 보면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고 있다. “사랑을 간직한채 떠날수 있게해준 당신께 고마움을 남깁니다”라는 표현은 오히려 차분하고 은은한 행복감에 가깝다.

관객 — 두 등장인물의 상황이 안타깝고 은은하게 슬프다.

 

비극으로 분류될수 있는 본 작품에서는 등장인물들과 관객의 감정상태가 분명히 다르다. 글쓴이가 제시했던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나의 주장에 “상대적”으로는 희극보다 비극에서 감정상태의 일치가 좀더 강하게 일어나지 않느냐? 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애매모호한 정의는 사실상 정의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무용한 것이다.

아울러 글쓴이의 정의는 한가지 중요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정의 그대로를 극 작가가 수용한다면 지나치게 전형적인 작품들만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비극에서는 관객과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편견을 갖게 된다면 슬픈 등장인물들만 쏟아 붓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비극을 만드려 할것이다. 다음은 영화 감독 로베르 브레송의 말이다.

“악마가 그의 입에 튀어 올랐다” : 이런 이미지를 묘사해야 할때, 악마가 입속에서 튀어오르게 하지는 말것
“모든 남편들은 흉악하다” : 이런 이미지를 묘사해야 할 때, 수천명의 흉악한 남편들을 보여 주지는 말것

영화적 표현에 있어서의 “간접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것인데, 이처럼 간접적인 표현방식이 대게는 보다 세련되고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글쓴이가 왜 위와 같은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에 대해 살펴보자. 사실 이것은 모든 분야의 연구자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와 관련이 있다.

 

편향의 문제

글쓴이의 사고과정을 추측해본다면, 우선 그는 비극과 희극의 사례 몇가지를 떠올려보았을것이다. 이중 글쓴이 본인이 관람했었던 강렬한 몇몇의 비극들이 마침 우연히도 “등장인물도 울고 나도 우는”류의 작품이었을것이다. 반면 희극의 경우는 사실 채플린의 작품들처럼 “등장인물은 울고 나는 웃는”류의 작품들이 제법 많긴 하다. 따라서 글쓴이는 손쉽게 이 지점에서 비극과 희극의 강한 차이를 느끼게 되고 손쉽게 비극과 희극의 정의를 만들게 된다.

일반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편향된 샘플을 가지고 결론을 내린 셈이 되는데 이것은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위에서 내가 했던것처럼 “혹시 반례가 있는가?”를 살핀다면 쉽게 예방할수 있는 문제이다.

 

인과관계와 상관관계의 문제  

미국의 대형 양판점인 타겟(Target)에서 고객 매출 데이터를 살피던중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30대 남성 고객의 상당수가 맥주를 사가는 경우 꼭 기저귀를 함께 구입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맥주 구입이 기저귀 구입의 원인인것처럼 보인다. 조사해보니 실상은 이런것이었다. 30대 남성 고객의 상당수가 결혼을 하여 아기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이 저녁에 본인이 먹을 맥주를 사가면서 아기를 위한 기저귀를 함께 구입한것이다. 여기서 맥주와 기저귀의 관계처럼 유사 인과관계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상관관계”라 불리우는 것이고, 진짜 원인인 “아기의 존재”와 결과인 “기저귀”사이의 관계가 인과관계이다. 연구에 있어서 양자가 혼동되는 경우가 빈발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글쓴이의 정의에서도 역시 이같은 혼란스러움이 보이는데, “등장인물의 감정”은 비극과 희극을 가르는 인과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관관계에 불과하다. 일단 대강 말하자면 “관객의 감정”이 여기에서의 인과관계가 되겠는데, 이에 따른다면 비극은 관객이 슬픈 극, 희극은 관객이 기쁜 극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므로 사실상 쓸모가 없는것이 된다.

 


명상에 대하여

잔잔님 글을 읽고 — 원본 글 : 링크

 

“당신의 췌장은 건강하신가요?” 라는 질문을 누군가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의사나 의대생이 아니라면, 아주 높은 확률로 배를 더듬으며 “내 췌장이 어디있지?”라며 머뭇거릴 것이다.  만약 이러하다면 당신의 췌장은 아주 건강한 것이다.

췌장이 진정 건강한자는 췌장에 관심이 없다. 그것이 내 몸의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며 그것이 건강한지 병들었는지는 애당초 관심사도 아니다. 오직 췌장에 문제가 있거나 예전에 있었던 사람들만 유독 췌장의 건강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산다. 이들은 물론 위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잘 대답할 것이다. “네 요새는 건강합니다”, “아니요 요새 췌장이 좀 안좋네요” 이렇게 말이다.

마찬가지로 진정 행복한자는 자신의 행복 상태에, 더 나아가 아예 본인의 존재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 이들은 대게 바깥세상에 관심을 두고 자기를 잊고 산다. 쉽게 말해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사는 것이다. 나는 이를 “자아멸각”이라 부르는데, 자아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오직 불행하고 인생이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사람들만이 행복의 문제라던지, 행복론 따위에 관심을 두고 온갖 자기개발론이나 행복 테크닉들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온 정신을 자아에 집중시키므로 자칫 잘못하면 행복에 있어서 필수적인 자아멸각을 방해할수도 있다.

자아멸각을 실현하는 방법은 아주 다양한데, 잔잔님이 하고 있는 “명상”도 “원론적”으로는 이 중 하나에 포함된다. 사실 우리가 흔히 “명상”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그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나는 여기서 명상을 내 임의로 “불교적 명상”과 “서양식 명상”으로 구분짓겠다. 둘중에서 오직 “불교적 명상”만이 자아멸각을 실현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다.

불교적 명상은 말 그대로 석가모니가 해탈을 위해 사용했던 방법론이다. 여기서 한가지 고백을 할것이 있는데 나는 사실 이 불교적 명상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해탈해서 부처님이 되지는 못했으니 당연한 말이겠다. 아무튼 순전히 이론적인 말을 하자면, 불교적 명상은 명상을 통해 자아를 통찰하여 자아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개념임을 온몸으로 진정하게 인식한후 자아멸각을 이루는 과정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을 들으면 눈치챘겠지만 사실 이것은 아무나 못하는 일이다. 심지어 나는 시중의 불교 승려들중 과연 몇 퍼센트가 이 난해한 불교적 명상을 진정 제대로 실천한후 자아멸각을 이루는데 성공했을지 의문을 갖고 있기도 하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승려들이 명상을 할때 느끼는 기쁨과 그들이 마당 청소에 집중할때 느끼는 기쁨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취지로 말한적이 있는데 나도 러셀의 견해에 동의한다. 아울러 나는 이 불교적 명상이란 것이 자아멸각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이 섯불리 시도했다가는 도리어 자아집중을 유발시킬수도 있다는 점에서 조심히 다루어야 하는 상당히 위험성이 있는 물건으로 본다.

다음으로 서양식 명상은 미국인들이 위와 같이 매우 어려운 불교적 명상을 쉽게 각색한후 일종의 “릴렉스”수단으로서 보급한 것이다 (즉, 여기에는 미국 특유의 자기개발 비즈니스적인 냄새가 베어있다). 시중에는 흔히 “마음챙김 명상”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명상의 효과를 다루는 대부분의 의학논문들은 이 명상을 기준으로 그 효과의 실증작업을 한다. 개인적으로 볼때 기분을 릴렉스해준다는 측면에서 나름 유용할수도 있다고 보지만, 솔직히말해서 굳이 이것을 시간을 내면서까지 해야하나? 라는 생각이 드는게 사실이다. 위 러셀의 말처럼 그냥 자기방 청소를 집중해서 열심히해도 이 서양식 명상의 효과는 대충 나오기 때문이다.

 

명상에 대해 더 알아보기 

명상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을 위해 몇가지 책들을 추천하겠다.

1.명상의 철학적 기초 (한자경 저)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가 쓴 책인데, 한 교수는 독일철학과 불교학을 동시에 전공한 분으로 이론과 실천사이의 “균형감각”을 갖추고 있다는점에서 의의가 있다. 시중의 명상에 관한 책들은 왠지 계룡산 도사님들이 쓴것만 같은 정체불명의 요상한 분위기의 책들도 많이 있다. 이런 현실에서 한자경 교수의 책은 어느정도 검증되고 공인된 내용을 담고 있어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 나는 이책은 읽어보지 못했고 한자경 교수의 다른 책인 “불교의 무아론”과 “불교철학의 전개”만을 보았었는데, 내가 읽어본 책을 바탕으로 생각해볼때 이 책도 품질에 큰 문제는 없을것으로 예상한다.

2.팔정도 (비구 보디 저) 
단돈 1000원짜리 책인데, 의외로 불교철학과 불교식 명상에 대해 교과서적이고 무난한 내용을 잘 요약해서 담고 있다. 명상의 실천을 위한 책이라기 보다는 이론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 볼만한 책이다.

3.위빠사나 명상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저)
불교식 명상중 한 종류인 위빠사나 명상을 일반인 기준에서 설명한 명상 실천 작업을 위한 책이다. 위에서 말했지만 이런 명상 분야에는 온갖 정체불명의 도사님들과 자기개발코치들이 설치고 있다. 그래서 위험한 책들을 피해가는 것이 중요한데, 이 책의 저자는 위 한자경 교수와 유사하게 학문적 이론과 승려로서의 실천을 모두 균형있게 갖추고 있다. 내용도 그대로 따라하면 명상을 해볼수 있을정도로 쉽고 무난한 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밝혔듯이 나는 명상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이라 이 책의 내용을 직접 실천해본적은 없음을 밝혀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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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응답

  1. 써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반례를 찾고 있었는데, 올려주신 영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네요.(역시 게으름이 죄악입니다 ㅋ큐ㅠ)
    어리고 부족한 생각에 대한 정성스러운 코멘트 감사해요.
    지나치게 코미디에 편향된 샘플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에 너무 빠진 것 같아요. 물론 그 말은 여전히 너무 사랑하지만요. 말씀하신 전형성에 대한 걱정은 되지만…
    틀린 건 바로잡고, 사랑하는 건 붙잡아보며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늘 많이 배웁니다. 감사해요.

    1. 네, 블로그를 보니 흥미로운 생각들을 많이 하시더군요.

      저도 코미디의 메커니즘에 관심이 좀 있는데, 여기 홈페이지에 “코미디”로 검색해보시면 대충 이에 대해 써논 글도 있을겁니다.

      앞으로 계속 좋은 글 부탁합니다:)

      1. 네 저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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