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영화 촬영 가이드 라인 — 언제 흑백으로 촬영할 것인가?

현대에 흑백영화를 제작한 여러 감독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대게 흑백영화가 “느낌이 좋다”, “분위기를 잘 살려주었다” 식의 막연한 기분이나 “슬픔이 잘 드러난다”식으로 영화의 내용과 관련지은 자신의 감상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불확실한” 감상에서 벗어나, 흑백촬영이 권고될수 있는 “분명한” 조건들을 최대한 찾아보려 노력할 것이며, 이를 위해 형이상학적인 근거보다는 심리적인 근거에 더 주목을 하였다.

사실 과거의 필름 환경에 비해서 현대의 디지털 영화 제작 환경에서는 촬영시에 손쉽게 흑백과 컬러간의 전환과 비교를 할수 있으며, 촬영 후에도 후처리로 양자간 전환이 비교적 쉬운편이다. 그러나 미리 이론적으로나마 흑백촬영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갖고 있으면 좀더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영화 제작이 가능할 것이다.

1.흑백과 컬러 무엇이 원칙인가?

흑백촬영과 컬러촬영중 무엇이 원칙적으로 우선 선택되는 촬영일까? 이에 대해 흑백을 원칙으로 주장하는 영화감독도 있지만, 컬러를 원칙으로 삼는게 무난할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가 컬러로 지각되며, 컬러의 정보량이 훨씬 많고, 대부분의 영화가 통상적으로 컬러로 촬영된다는 사실들이 근거가 된다. 따라서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우선적으로 컬러로 촬영하되 흑백으로 촬영해야 하는 특별한 실익이 있다면 흑백으로 촬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흑백촬영의 분명한 효과

모든 형이상학적이고 개별 창작자에게만 본유하는 감정적인 이유를 배제하고 남은, 흑백촬영의 효과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1)색의 차원을 축소시켜 흑색과 백색의 대조를 더욱 강화한다
2)영상의 비현실성을 증가시킨다
3)고전영상이라는 인식을 준다

위 세 요소만큼은 의심할바없이 아주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1)과 2)는 생물학에 기반한 심리적 효과이고, 3)은 사회적인 이유에 기반한 심리적 효과이다. 이들 효과에 따라 나름의 촬영 지침을 만들수 있는데, 각각의 효과에 대한 설명은 이 지침의 설명에서 함께 하겠다.

3.피사체의 50%이상이 흑색 또는 백색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흑백으로 촬영하라

흑백영상은 색의 차원을 축소시킨다. 모든 색을 흑색 또는 백색의 양 극단으로 몰아 넣어 재배열하는 효과가 있는데, 예를 들어 적색이 있다면 흑색과 백색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어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상의 모든 색들 간의 차이가 보다 심해져 대조가 뚜렷해지고 단순화되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피사체의 50%이상이 흑색 또는 백색으로 이루어지는 극단적인 환경에서는 흑백촬영이 색의 대조를 강화하여 보다 분명한 효과를 내주므로 유리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경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라던지, 야간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를 들수 있다. 홍상수 감독의 “강변호텔”은 흑백으로 촬영되어 설경이 잘 부각되었으며 동 감독의 “탑”은 흰색 벽지의 건물내에서 주로 촬영되어 역시 본 지침의 좋은 사례가 된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는 컬러영화이지만 본 지침에 따른다면 흑백으로 촬영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작품이다.

4.배경이 산만하거나 후지다면 흑백으로 촬영하라

이는 흑백촬영의 효과 1)을 응용한 것으로, 배경이 어수선하거나 색이 아름답지 못한 경우에 흑백으로 촬영하면 색의 차원이 축소되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

5.비현실적인 장면이 필요한 경우 흑백으로 촬영하라

현실세계가 컬러로 지각되므로 당연히 흑백영상은 관객에게 비현실적인 것으로 지각된다. 이같은 효과를 응용하여 영화내에서 “비현실성”을 강조해주고 싶을때 흑백으로 촬영할수 있다. 예를 들면, 꿈속 장면이거나 과거 회상 장면을 들수 있겠다. 장률 감독의 “춘몽”은 이 같은 효과를 잘 이용한 작품이다.

6.고전적 분위기를 풍기고 싶다면 흑백으로 촬영하라

흑백영화가 근대시기에 주로 촬영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객들은 흑백영상을 보며 고전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는 흑백영화의 나머지 두 효과들과는 달리 “사회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는 세대나 사회계층에게는 이같은 흑백영화의 효과가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즉, 영화라는 매체를 평생 접해본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나타날수 없는 효과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최대한 분명해보이는 지침으로서 마련된 것인데, 모두 가설이므로 실증이 필요하다. 특히 첫번째 지침에서의 50%는 임의의 숫자를 부여한 것이다. 실증은 인지심리학적인 실험과 같이 과학적인 방법도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7.기타 가능한 제안들의 검토

마지막으로 본 영화잡지 기고자간의 토론중에 나온 의견중 두가지 인상적인 제안에 대해 검토해보겠다.

(1)흑백영화는 배우의 연기를 분명하게 강조해준다?

흑백의 대조 효과가 배우의 행동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만들어 준다는 원리인데, 물론 어느정도 이같은 효과가 있는것은 사실이겠지만, 이 효과를 노리고 흑백으로 촬영한다는 것은 실익이 없어보인다. 즉, 지침으로 삼을 정도의 효과는 아니다.

(2)흑백영화는 배우의 눈빛을 살려준다?

이 의견은 상당히 “신비주의적”인 것인데, 사실 눈빛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눈에서 빛이 나올리가 없으니 당연한 말이다). 우리가 눈빛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선”에 관한 것이고, 이 시선은 상대방의 눈과 이 눈이 향하는 피사체를 잇는 직선의 “가상선”이다. 따라서 눈빛이나 시선이나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을 볼때 분명히 “눈빛”이라는 것을 심리적으로 느낀다. 어쩌면 진화심리학적인 이유일수도 있겠는데, 상대방의 “눈”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 기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결국 눈빛은 이렇게 만들어진 의미로 인하여 느껴지는 일종의 착각이 된다.

흑백영화가 이 눈빛이란 것을 살려주는 것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위에서 살펴봤던 흑백영화의 첫번째 효과 때문 인듯하다. 흑색의 눈동자와 흰자의 대조가 더욱 뚜렷해지면서 눈 부위가 강조되는 지각을 눈빛이 강렬해진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흑백영화에서 악당의 눈빛은 더욱 악하게 보일것이고, 미인의 눈빛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눈빛을 살려준다는 목적도 흑백촬영의 지침으로 삼기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 다른 모든 상황을 무시하고 오직 눈빛을 살려주려고 흑백촬영을 한다는 것은 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가 배우들의 얼굴을 클로우즈업 하는 장면 위주로 진행된다면 흑백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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