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영화 창작자를 위한 철학 1 | 일반인에서 영화 창작자로
영화 창작자를 위한 철학 2 | 버트런드 러셀과 좋은 삶 상편
영화 창작자를 위한 철학 3 | 버트런드 러셀과 좋은 삶 하편
영화 창작자를 위한 철학 4 | 아마추어 영화 창작과 연구의 요령
영화 창작자를 위한 철학 5 | 봉준호 감독, 창의성의 비밀
본 시리즈는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연재가 조기 종료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봉준호 감독의 명언을 통해 창의성이란 것이 과거의 전통을 열심히 탐구한 바탕 위에서 생겨 날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그렇다면 과거의 전통을 어떻게 탐구할것인지 즉, 레퍼런싱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무엇을 레퍼런싱 할 것인가?
저는 여기서 “레퍼런싱(referencing)”이란 단어를 아주 넓은 의미에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과거의 작품을 말 그대로 적법하게 “참고”하는 행위를 가르키기위한 목적에서 사용하겠습니다. 과거의 작품을 공부하고 연구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거나, 오마주 한다거나, 패러디 하는 것 등등 전부 여기에 포함될수 있을텐데, 본 글에서는 이들 행위 중에서 특히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의미에서 주로 이 단어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레퍼런싱의 대상은 물론 “고전”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그냥 고전이라고만 말하면 무조건 오래된 작품이면 다 고전인 것인지 좀 애매해지니 용어의 정의를 분명히 하겠습니다. 저는 고전이란 단어를 “최소한 하나의 세기, 즉 100년의 시간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떨치는 작품”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현재 개봉된 영화들은 최소한 100년은 지나야 고전이 될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셈인데, 물론 어느 영화가 나중에 고전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건 2150년즈음해서 당시를 살아갈 우리 후손들이 정하는 것이죠.
여기서 문제 하나가 생기게 되는데, 영화의 역사가 너무 짧기 때문에 엄격하게 위 기준에 따르게 된다면 레퍼런싱할만한 고전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범위를 넓혀서 영화 이외의 예술작품들을 레퍼런싱하거나 혹은 최대한 미래에 고전이 될 영화작품들을 추정하여 레퍼런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많은 영화의 걸작들이 희곡,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이나 미술 혹은 연극의 기법들을 많이 차용하고 있지요. 이것이 영화창작자들이 영화 이외의 다른 예술분야에도 관심을 가져야할 한가지 이유가 됩니다.
왜 고전인가?
여러분 중에 고전은 옛날 것이라 촌스럽고 트랜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현대의 레퍼런싱 대상으로는 별로이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 이유, 즉 고전이 레퍼런싱 대상으로 훌륭한 이유 몇가지를 들어 보겠습니다.
먼저 위에서도 말했지만 고전은 최소 100년의 시간과 지역을 뛰어넘어 영향력을 떨친 작품들입니다. 예를 들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은 250년 동안 전세계의 각종 논문에 5만회 이상 인용이 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칸트의 작품이 250년의 세월이란 테스트를 견디고도 그 가치가 전혀 변함이 없다는 뜻인데, 이런거 만드는 일은 아무나 하는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 칸트는 우리같은 보통사람들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람인 것이죠. 쉽게 말해 고전의 창작자들은 그냥 외계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처럼 그것을 만든 창작자의 자질 자체가 월등하게 탁월하므로 고전은 아무리 오래되어 낡아보이더라도 우리가 섬세하게 살핀다면 반드시 그속에서 어떠한 가치를 새로히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고전은 일종의 “원석”같은 것입니다. 이미 완전히 가공된 다이아몬드 반지들을 모아서 이것을 다시 물개형상의 다이아몬드 조각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할겁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지고 있다면 이 원석으로 부터 바로 물개형상을 가공해 낼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전이 아닌 현대의 작품들은 이미 꾸며질대로 꾸며지고 나름의 가공이 된 상태라 레퍼런싱의 여지가 많이 적습니다. 그러나 고전들은 이같은 가공이 적게 된 원석에 가까운 상태이므로 아무래도 레퍼런싱을 할 여지가 넓은 편이지요.
에릭 로메르 감독의 레퍼런싱
에릭 로메르 감독은 유명한 희곡이나 시, 소설 작품들을 레퍼런싱하여 여러 영화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살펴보면 레퍼런싱 대상이 된 원작들과 그의 영화간에 관련이 없어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1]. 심지어 로메르 감독은 자신이 히치콕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는데, 주로 사랑이야기 — 그것도 종종 코미디스러운 — 를 다루는 그의 작품들과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의 히치콕의 작품들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것인지 의아스럽기도 합니다.
혹시 로메르 감독이 구라치는 것은 아닐까요?😂 그냥 있어보이기 위해 히치콕을 들먹이는것은 아닐지 의심이 갑니다. 애이~ 로메르 감독님이 어떤분이신데 나의 로메르가 절대 그럴리가 없지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게 덜컥 덜컥 믿으면 곤란하고 무언가 의심스럽게 보이면 일단 좀더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서 제가 미리 살펴봤는데, 에릭 로메르 감독은 히치콕 감독을 분석한 책도 따로 내실 정도로 히치콕의 작품들에 관심이 아주 많은 분이더군요. 따라서 이분이 히치콕의 영화들을 레퍼런싱한 것은 사실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두 감독의 작품들이 외관상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한의학의 레퍼런싱?
사실 이 레퍼런싱 작업은 비단 예술영역 뿐만아니라 모든 학문분야에서 널리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분야에서의 레퍼런싱 케이스 한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015년 노벨 의학상 수상자로 중국의 기생충학자인 투유유 교수가 선정되었습니다(이름이 좀 특이한듯). 투 교수는 중국 고전의학서에 나오는 약초를 기반으로 하여 말라리아 치료제를 만들었는데 이같은 성과가 인정되어 상을 받은것이지요. 이에 우리나라의 한의학계에서는 한의학(동양의학)의 쾌거라며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한의학의 성과라고 보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서양 의학, 약학, 화학 등의 성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투유유 교수의 연구 과정을 대강 말하자면, 이 분이 한의학의 방식대로 약초를 약탕기에 넣고 푹고아 우려내서 말라리아 치료제를 만든 것이 아니고 약초를 “분자”단위로 아주 깊게 분석해서 말라리아 치료 성분을 “추출”해 낸 것입니다. 이 분석과 추출의 과정은 순전히 서양에서 발전된 화학 혹은 약학이란 학문에 의한 것이지 한의학(중의학)의 방법론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입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여기서도 에릭 로메르 감독의 레퍼런싱 사례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셨을텐데, 바로 레퍼런싱의 대상이 된 중국 고전 의학서 및 약초와, 레퍼런싱의 결과물인 말라리아 치료제 사이에 간극이 크다는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로메르 감독도 히치콕의 영화들을 단순히 겉껍데기만 흉내내는 식으로 레퍼런싱을 한게 아니라 “분자” 단위로 아주 깊게 “분석”을 하였고, 그 결과 히치콕의 영화에 영감을 받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작품이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종합하자면, 좋은 레퍼런싱이란 “고전”을 “분자”단위로 “분석”하면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영화에서의 “분자” 단위는 무엇인지가 문제됩니다. 물론 여기서의 분자가 영화 필름이나 메모리 디스크를 화학적으로 분석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닐겁니다. 영화에서의 분자는 무엇인지 다음편에서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더 알아보기
앞서 말했듯이 영화의 역사가 워낙 짧은 관계로 영화 창작자는 불가피하게 레퍼런싱의 대상을 영화 작품 뿐만이 아니라 문학, 미술, 연극 등등 으로 그 범위를 넓히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 위해 다음의 책을 추천합니다. 이 책을 통해 미술의 수천년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이전 편에서 잠깐 언급하였던 “예술적 사고방식”을 익힐수 있고, 여러 미술 작품으로 부터 직접적으로 영화적인 영감을 얻을수도 있겠습니다.
1.서양미술사, 곰브리치 저, 예경 출판사
각주
[1] 한 가지 예로서 영화 <녹색광선>을 들수 있는데, 원작인 소설 <녹색광선>과는 내용상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소설 녹색광선 리뷰 글을 참고하세요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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