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앙드레 지드가 쓴 지상의 양식에 큰 의미가 있다고 느껴져서 또 읽고 있다. 내 생각에 이 책은 두가지 점에서 의미를 찾을수 있는데 하나는 행복의 문제에 있어서고 또 하나는 창작 작업에 있어서 의미가 있다.
행복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관심이 외부 세계를 향해 있는데, 다시 말해 이들은 본인 자신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자신에 대해 관심을 꺼야지 마음먹는식으로 행복해진다는 소리는 아니다). 내 생각에는 외부세계 중에서도 이들은 특히나 “자연(또는 대지)”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철학자 러셀은 현대인들이 근본적으로 불행한 이유는 대지와의 접촉이 끊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아쉽게도 러셀은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를 해놓지는 않았다. 이 묘사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문학이나 예술로 표현을 해야 할 것인데, 이 분이 예술가는 아니기 때문에 본인은 대지와 접촉 많이하며 행복하게 살았지만 정작 실감나는 설명을 우리에게 해주지는 못한 것이다.
내가 지상의 양식을 읽는 이유는 러셀의 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함인데, 내가 지금까지 본 책 중에서 러셀이 위에서 말한 “대지와의 접촉”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한 문학 작품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 한가지가 러셀과 앙드레 지드는 철학적으로는 완전히 반대의 사람인데 “대지를 즐길줄 아는” 똑같은 능력을 갖고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이 능력은 단순히 벚꽃을 보고 우와 아름답다 하는 정도를 넘어서는 “특별한 능력”인데, 천박한 상상을 곁들여 쉬운 예를 들자면, 앙드레 지드는 롤스로이스에서 하차하는 즐거움보다 압도적으로 큰 즐거움을 길거리에 떨어진 하찮은 돌맹이를 보면서 느낄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지드는 구태여 돈벌려고 경쟁하며 애를 쓸 필요가 없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대지에 지천으로 널린게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도 자신의 전재산을 처분하고 아프리카에서 노숙하고 여행다니며 쓴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난 편에 이어 “지상의 양식”에서 내가 받은 인상을 패러디하여 본 고양이 3부작을 완성하려고 한다. 아울러 이 책이 가진 두번째 의미는 내 작품 말미에 짧게 언급하겠다.
고양이의 양식
츄타나엘이여!
나는 오늘 츄르를 가지고 고양이를 만나러 갔다. 고양이를 만나러 가는 기쁨에 비하면 산책길의 가파름 따위는 내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큰 기쁨에 당연히 따라오는 작은 수고스러움 정도다). 나의 고양이는 노란색 치즈냥이었는데, 아니 치즈라기 보다는 그것은 황금냥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리라.
츄타나엘이여! 그대는 고양이를 쓰다듬어 본적이 있는가? 이 치즈냥의 털들이 나의 손바닥 위로 가볍게 스칠때 나는, 황금색 벼가 끝없이 펼쳐진 어느 평야 위를 거니는 듯 한 기분이다. 정신없이 추수를 하는 농부가 되어 나는, 고양이 위에 살고있는 진드기 따위는 더이상 두렵지가 않았다.
나는 츄르 한봉지를 꺼내 뜯어 고양이에게 주었다. 짭짜름한 비린내가 살짝 내게 풍겨왔을때 나는, 이미 광대한 태평양 바다위에 떠있는 참치잡이 어선위에 서있었다. 그렇게 내가 참치를 잡고 있을때 고양이는 츄르를 먹었다. 츄르를 다 먹은 고양이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사라진다.
츄타나엘이여!
고양이를 미워하지 마라! 고양이는 우리의 언어를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의 냐옹이 고마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고마움도, 도덕도 모르는 자들이다. 나는 도리어 이들의 부도덕함과 도도한 태도가 사랑스럽다!
자고로 사랑받을자는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는 도도함을 가져야 할 것이니, 그대도 더치패이란 말은 마음속으로도 하지 말기를. 얻어먹었으면 그저 도도한 침묵을 지키며 끝까지 지갑을 지키는 것이 좋다.
-끝.
사실 지드의 원작은 이보다 한 열배는 화려한 수사로 꾸며져 있다. 나는 처음에 이 책을 읽었을때 이렇게 화려한 문체 때문에 빈수레가 요란한 작품이 아닌가 오해를 했었는데 전혀 그런 책이 아니고 자세히 살피면 이 분의 깊은 통찰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임을 알수가 있다. 내 패러디 작품에서처럼 지드는 굉장히 사소한 것에서 엄청난 환희와 기쁨을 느낀다. 예를 들면 휘황찬란하게 어떤 기쁨을 묘사하는데 알고 보면 그냥 귤하나 까먹은거다.ㅋㅋ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 어떤 통찰을 이끌어낸다는 점이 본 작품이 갖는 두번째 의미인 창작에 있어서의 의미이다. 아울러 내 패러디작에서처럼 지드는 도덕에 의미를 두지 않고 선이든 악이든 가리지 말고 다 사랑하라고 말한다.
추가: 본 글의 원문은 예전에 나의 인스타에 연재하던 것인데, 이 글을 쓴 이후로 나의 앙드레 지드에 대한 이해가 훨씬 깊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위 글에 다소 틀린 부분이 있으나 굳이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음을 밝혀둔다. 일례로 위에서 나는 러셀과 지드가 완전히 다른 철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는데, 표면적으로 그럴지 몰라도 내가 살펴본 바로는 두 사람은 사상적으로 동일한 부분이 의외로 많음을 깨닫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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