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소설가 박상우의 <내 마음의 옥탑방>이란 작품의 원문이다. 1999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고대 그리스의 시지프 신화를 모티브로 쓰여진 소설이라 한다.
개인적으로 시지프 신화에 관심을 갖다가 이 작품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연구를 위해서 가져온것인데, 지금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시점에서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고 나중에 찬찬히 보려고 한다. 참고로 시지프 신화와 관련된 창작물로는 카뮈가 쓴 동명의 책이 가장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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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옥탑방 / 박상우
나의 기억 속에는 세월이 흘러도 불이 꺼지지 않는 자그마한 방 한 칸이 있다. 내 나이 스물여덟이었을 때, 나는 삼층 건물의 옥상에 위치한 그것을 처음 목격했었다. 목격했었다, 라고 말하는 건 당시에 내가 받았던 기이한 충격감이 반영된 결과일 터이다. 삼층 씩이나 되는 번듯한 양옥 건물의 옥상에 그렇게 허름한 주거공간이 얹혀 있을 수 있다는 사실ㅡ그것은 나는 일종의 파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지고 사람들이 거처할 공간이 줄어든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옥상에까지 방을 들이고 세입자를 받아들일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건물 옥상에다 방을 들이는 일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낮은 초가 지붕이 조화를 이루는 농촌에서 자라난 나로서는 그것을 서울에서 겪은 또 하나의 문화적 충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로 올라와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직후 , 같은 학과 친구들과 고향 얘기를 나누던 자리에서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진 일이 있었다. 돌아가면서 각자의 고향을 밝히던 참에 누군가 내 고향은 용산이야, 하고 말한 때문이었다. 거창과 포항과 안동과 제주도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용산이라니!
용산이 누군가의 고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과 건물 옥상에도 방이 들어앉을 수 있다는 사실ㅡ그것이 십 년 세월 저쪽의 시공에서 내가 겪었던 크고 작은 문화적 충격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낮은 초가 지붕에 환하게 피어난 박꽃이 내 성장의 배경이었다면, 그것이 달빛과 이슬에 젖는 밤풍경은 내 감성의 고향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촌놈이 바로 나였으니까.
아무튼 옥상에 얹혀진 방을 처음 목격한 직후부터 나는 그것을 정서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은근히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마찰과 충동이 사뭇 불편하게 느껴진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삼층 건물 옥상에 위치한 그 공간을 ‘공중에 떠 있는 방’으로 명명했다. 그곳을 정서적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내 나름대로는 꽤나 고심한 뒤에 얻어진 표현이었다. 옥상 아래 누가 사는지에 대해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직 내가 출입하게 된 방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생각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 방의 주인은 나의 표현을 ‘용산’으로 받아들였다. 다소 몽환적인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 나는 그걸 단박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 이런 곳에 위치한 방을 도대체 뭐라고 부르나, 나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삼빡한 분절음으로 또박또박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옥, 탑, 방.
그것은 내가 지상에서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해괴한 말이었다. 생계망계한 표정으로 옥, 탑, 방, 하고 나도 또한 그녀처럼 발음해 보았지만 그것이 하나의 단어라는 느낌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불협관계의 극치를 드러내는 듯한 그 세 글자를 어떻게 하나의 단어로 뭉뚱그릴 발상을 할 수 있었는지 정말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단언하건대 십 년 전 그때, 항간에서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누가 그렇게 황당한 명칭을 만들어 냈을까, 나는 그녀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
꿈을 꾸듯 몽롱한 표정으로 그녀는 대답했다. 푸르스름한 어둠에 젖은 창유리 위로 서너 개의 별이 떠올라 있을 때였다. 가늘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그런 말이 어디 있느냐고, 차라리 옥상방이면 몰라도 그건 말도 되지 않을 조어(造語)라고 나는 그녀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옥탑방이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단호하고 완강한 어감처럼 끝끝내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옥탑방이라니까…… 하고 말하고 나서 자신의 고집에 스스로 질려 버린 사람처럼 두 무릎 사이에다 돌연 얼굴을 묻어 버린 것이었다.
탑(塔).
단 한 글자가 바뀐 것이지만, ‘상(上)’이 ‘탑(塔)’으로 바뀔 때 일어나는 느낌의 차이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옥상방, 하고 발음하면 옥상에 위치한 방으로 그것의 의미가 절로 설명된다는 걸 알 수 있으리라. 하지만 옥탑방, 하고 발음하면 완연히 다른 느낌. 일테면 요령 부득의 위압감이나 이방감 같은 게 먼저 느껴진다. 게다가 발음까지 단호하고 완강한 감이 있어서 무엇인가, 그것의 이면에 언뜻 떠올리기 어려운 폐쇄감까지 깃들여 있는 것 같다. 인간들이 북적대는 지상으로부터 아득하게 유배된 공간, 요컨대 공간 자체에 이미 깊은 절망과 고뇌가 배어 있는 것처럼 되새겨지는 것이다.
십 년이 지난 지금, 옥탑방이라는 조어는 항간에서 흔히 통용되는 말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고통을 자각하기보다 그것에 길들여지며 한심스럽게 나이를 먹어 가느라 그것이 널리 쓰이는 말이 되었다는 걸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감원당한 직원들의 송별연을 마치고 늦은 귀가를 하던 길에 나는 도처에 굴러 다니는 옥탑방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좌석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사십대의 사내가 읽다 놓고 내린 생활정보지를 무심히 펼쳐 들고 건성 넘겨 나가다 컥, 나도 모르게 목이 막히게 하는 뼈저린 단어의 나열을 목도하게 된 것이었다.
옥탑방 13평 도시가 주방 보500-20 항시 입주가
단독 옥탑방 화장실 주방 기름보 전1500 월세가
옥탑방 전철 5분거리 전700 절충가
생활정보지를 훑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그곳에서 몇 개의 단어를 확인한 다음 순간부터 나의 싯너은 나도 모르게 차창 밖의 밤하늘로 옮겨져 갔다. 그리고 탁하게 가라앉은 장마철의 밤하늘, 그곳의 허공에서 여전히 불 밝히고 있는 자그마한 방 하나를 발견했다. 그런 방들이 이제 지상의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은 나를 조금도 슬프게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옥탑방이라는 말이 신비감을 잃고 생활정보지의 일이만 원 짜리 광고란에까지 흔하게 등장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는 것도 전혀 유감스럽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속물스런 지상으로 내려가기 위해 오히려 자신의 꿈을 공중에 비끄러맬 줄 알았던 한 여자의 절망과 체념이 아프게 그리울 뿐이었다.
옥탑방에서 지상의 속된 삶을 아프게 관망했지만, 인간의 아름다운 숙명이 결국 지상으로 돌아가는 데 있는 거라는 걸 순순히 시인할 줄 알았던 그녀ㅡ자신의 옥탑방이 이 지상에 영원히 남아 있길 바란다던 그녀는 지금 어느 하늘 밑에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
내가 그녀를 눈에 익히기 시작한 건 그 해 여름이 끝나 갈 무렵부터였다. 무심히 지나치던 풍경의 세계, 한없이 무료하고 무의미해 보이던 평면의 일부분이 슬그머니 돌출하는 느낌으로 그녀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가 항상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와 같은 변화가 나의 내부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아주 쉽사리 눈치챌 수 있으리라.
그 무렵, 나는 형의 소개로 입사하게 된 스포츠-레저 용품 수입업체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른바 레포츠(leports) 물품을 수입해서 백화점과 유통업체를 통해 판매하는 회사였는데, 그 회사의 사장이 형의 대학 동기라서 내 자의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자리를 얻게 된 것이었다. 국문과를 졸업하고 그런 회사의 백화점 영업을 담당하는 사원으로 뛰고 있었으니 적성 같은 건 애시당초부터 따질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 자기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만, 대학을 졸업하고도 반 년씩이나 빈둥거리던 나에게 형이 직접 나서서 얻어 준 직장이었으니 가타부타 나로서는 감정을 드러낼 만한 입장이 더더구나 아니었다.
일곱 살 터울의 형에게 나는 대학 시절부터 혹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적잖은 나이 차이 때문에 형과 나 사이에는 살갑거나 끈끈한 혈육의 정 같은 것도 별로 형성돼 있지 않았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 학교 계단에서 굴러 뇌진탕으로 죽은 작은형에 대한 기억, 그것이 나에게는 살아 있는 큰형에 대한 현실적인 정보다 훨씬 우세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큰형에 대해 불펴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만약 작은형이 살아 있었다면, 하는 가정을 얼마나 여러 번 나는 혼자 곱씬곤 했던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부터 나는 형네 집에 얹혀 살기 시작했다. 얹혀 살기만 한 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내 학비도 전적으로 형이 조달했다.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형은 나로 인해 가정적인 불화까지 혼자 감내해야 했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입사해서 경제적으로 형편이 괜찮은 집안의 딸과 결혼까지 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나라는 존재, 다시 말해 딸린 혹만 아니었으면 형은 사회적인 상승감을 얼마든지 구가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농사일에서 손을 뗀 아버지가 이제 이 집안의 가장 노릇은 네가 해야 한다며 형에게 나를 일임한 뒤부터 모든 것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나라는 혹으로 인해 형의 행복에 잠정적인 집행 유예가 선언된 것이었다. 과묵한 형은 그것을 거부할 수 없는 일로 수긍하려 했지만 형수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행복에 대한 향유권이 나로 인해 침해당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불만을 기회 있을 때마다 형에게 퍼부어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혼할 때 친정에서 장만해 준 이 아파트가 당신네 집안 기숙사인 줄 아냐고 형수는 때마다 악을 썼지만, 그것에 맞대응하는 형의 고함이나 언성을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해 여름이 끝나 갈 무렵, 나는 수치에 대해 깊은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니던 회사에서 수립한 그 해의 판매 전략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그것이 마치 영업사원들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 사장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고가 상품과 저가 상품의 시장 대립에서 사장이 그 해외 전략으로 수립한 게 저가 상품의 대량 판매였는데, 어찌 된 셈인지 구매자들은 비슷한 품질의 물건을 싸게 공급하겠다는 사장의 깊은 배려를 보기 좋게 무시해 버렸다. 내가 담당하는 시내 중심가의 백화점 매장에서도 연일 연패, 저가 상품은 고가 상품에 밀려 낯뜨거운 판매 실적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텐트 1, 레저 테이블 2, 버너 0…… 하는 식으로 매장을 찾아갈 때마다 내 가슴을 뜨끔하게 만들곤 한 것이었다.
가마솥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내내 나는 수치에 대한 공포감과 싸웠다. 날마다 백화점 매장을 돌며
판매 실적으로 체크하고, 그것을 회사로 돌아가 사장에게 보고하고 온갖 수모를 당하는 반복적인 일상ㅡ저주스런 여름의 하루가 막을 내리는 저물녘마다 나는 혼자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병을 비우며 그날 하루치의 숫자를 술로 세척해 내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름이 끝나 갈 무렵, 수치에 대한 나의 공포감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이되어 엉뚱한 심리적 징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판매 결과로 집계된 수치가 아니라 그것과 연관된 장소에 대해 깊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곤욕스런 현실이 만들어 낸 일종의 고소공포증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담당하는 백화점들의 레포츠 용품 매장은 대개 5층이나 6층에 있었다. 여름 내내 수치와의 전쟁을 치른 때문인가, 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백화점 입구에 당도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5층이나 6층으로 올라가는 일, 아니 올라가야 한다는 현실적 당위성에서 깊은 두려움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백화점 매장을 일일이 둘러보고 회사로 돌아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11층으로 올라가 사장에게 보고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올라가기가 싫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하루가 막을 내리고 저녁 대신 꼼장어나 닭똥집 같은 것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형네 집이 있는 아파트 단지에 이르렀을 때에도 마찬가지, 선뜻 17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난감한 눈빛으로 형네 집에서 밀려 나오는 아득한 불빛으로 올려다보곤 한 것이었다.
무슨 망상인가.
나에게서 나타나는 심리적 이상 징후를 스스로 진단하기 위해 나는 과거의 기억까지 더듬어 보았다. 작은형이 학교 계단에서 굴러 뇌진탕으로 죽었다는 것, 그것이 어린 시절의 나에게 높은 곳에 대한 공포감을 심어 주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 현실적으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5층과 6층, 그리고 11층과 17층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나는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었다. 5층이나 6층을 포기하면 11층과 17층까지 덩달아 무너지는 현실, 그것이 나의 희망이자 또한 절망이었기 때문이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 때 나는 극도로 긴장하고, 그곳에서 내려온 뒤에 나는 극도로 무기력해졌다. 그래서 위로 올라가기 전, 나도 모르게 서성거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백화점 입구에 당도해서도 선뜻 매장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뭇 초조한 표정으로 주변을 서성거리곤 한 것이었다. 날마다 지나쳤을지도 모를 그녀를 s가 눈에 익히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즈음, 올라가고 내려오는 동안에 내가 정신적인 공황 상태를 경험하곤 할 무렵이었다.
그녀는 망토가 덧붙은 빨간 제복과 동일한 색상의 둥근 모자를 쓰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엇다. 하지만 세상의 불유쾌한 점액질 기류를 뒤집어쓰고 수치와의 전쟁에 골몰하던 여름 내내 나는 그녀를 단 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길을 걸을 때나 일정한 장소에 머물러 있을 때, 특정한 사물을 눈여겨보지 않는 이상한 버릇에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길들여 있었다. 전체를 동시에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상태ㅡ세상에 대한 깊은 무관심을 나로 하여금 그런 관망법을 절로 터득하게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그녀를 눈에 익힌 뒤부터 나는 일종의 집중력을 느끼며 그녀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수치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며 레포츠 매장으로 올라가기 직전, 심리적인 긴장감이 한껏 고조될 때라서 다른 건 도무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5층의 매장과 어제의 판매 수치, 그리고 그녀에 대한 집중력이 나의 내면에서 격렬한 전면전을 치르는 것 같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뒤부터 그와 같은 혼돈을 씻긴 듯 사라져 버렸다. 5층의 매장도 수치에 대한 공포감도 까맣게 잊은 채, 오직 그녀를 훔쳐보기 위해 백화점 입구를 서성거리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내밀한 안도감을 맛보곤 한 때문이었다.
ㅡ안내/INFORMATION
그녀는 백화점을 찾아온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해 주는 안내 직원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훔쳐보는 동안, 그녀에게 다가가 뭔가를 문의하는 사람을 나는 별로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화사한 제복과 모자를 착용하고 출입구 안쪽에 앉아 있는 그녀가 때로는 전시된 마네킹이나 인형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꿈을 꾸듯 몽롱한 표정과 눈빛, 그리고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유폐시키고 있는 듯한 깊은 정지감ㅡ예컨대 미감을 자극하는 인물화가 아니라 고적한 풍경화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나는 서서히 감정의 균형을 잃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질로 구현된 꿈의 성전 백화점에서 특정한 무엇인가에 대해 집중력을 발휘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의 시선과 의식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물질의 성채가 사방에서 빛을 발하는 공간ㅡ백화점은 인간의 꿈이 물질로 구현된 꿈의 성전이었다. 물질에 대한 숭배심 때문인가, 성전 안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동경과 선망이 가득한 순례자 같은 눈빛으로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요컨대 젖과 꿀이 흐르는 현대판 가나안, 무한대의 물질적 유혹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공간에서 나는 기적 같은 집중력을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꿈에 굶주린 사람들을 성전으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안내자ㅡ그녀가 물질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이 나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총으로 받아들여졌겠는가.
가을을 재촉하는 가랑비가 내리던 어느 날 오후, 나는 오랜 망설임을 떨쳐 버리듯 고적한 풍경화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화사한 물질의 바다, 나의 귀에는 아무런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업무용 다이어리와 납품 내역서 따위가 들어 있는 검은 손가방을 나는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린 그녀에게, 잠깐만 보관해 주세요, 하고 짧게 말했다. 단 몇 초 동안이었지만,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눈빛을 아주 가까이서 확인할 수 있엇다. 깊은 몽롱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깨어났을 때처럼 그녀의 동공은 한껏 열려 있었지만, 애초에 마음 먹은 대로 나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5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무슨 작심을 했던 것일까,
5층의 매장으로 올라갔다 내려온 뒤에 나는 그녀에게서 손가방을 돌려받았다. 내가 고맙다고 말하자 비로소 안도하는 표정으로 아뇨, 하고 그녀는 아주 조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스물넷인아 다섯, 얼핏 그녀의 나이를 가늠해 보다가 나는 황급히 등을 돌려 백화점을 빠져 나왔다. 다시 몽환적인 눈빛으로 돌아간 그녀에게 나는 울컥, 나의 진실은 가방에 있었던 게 아니라는 말을 내뱉고 싶어진 때문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더 이상 그녀를 훔쳐보지 않았다. 훔쳐보는 대신 잠시 가방을 맡겼던 걸 빌미삼아 그녀에게 가벼운 인사를 하며 백화점을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입구를 지나칠 때마다, 깊은 침잠에서 퍼뜩퍼뜩 깨어나는 표정으로 그녀는 얼결에 나의 인사를 맞받아주곤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나에게 막연한 존재에 불과했고, 그녀가 나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나는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녀에게 돌발적으로 가방을 맡긴 것이나 인사를 하고 다닌 짓거리는 일종의 객기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심한 청춘.
어느 날 새벽, 술을 마시고 돌아와 곯아떨어진 나를 형이 흔들어 깨웠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내 방에는 불도 밝혀져 있지 않았고, 형은 우두커니 어둠 속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몇 시나 됐냐고, 손을 들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나는 형에게 물었다. 하지만 시간 따위는 알 필요도 없다는 듯 형은 냉랭한 어조로 이렇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네 형수한테 시달려서 이런 말 하는 거라는 생각도 할 필요 없다. 아버지가 작년에 중풍으로 쓰러진 뒤에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만…… 다른 거 다 접어 두고 너도 이제 그만 가정을 꾸렸으면 좋겠구나. 너 결혼하는 거 보고 눈 감는 게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
형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알았어요, 하고 나는 잘라 말했다. 하지만 형의 요구에 응하겠다는 뜻으로 내가 알았다는 대답을 건넨 건 결코 아니었다. 형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배경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 실제로 나의 결혼을 보고 눈을 감는 거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형은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드리기 위해 나에게 결혼을 권유하는 게 결코 아니었다. 도둑이 제발 저리듯,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형은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이며 내 기분을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혹시 여자가 없다면 내가 중매를 주선해 보마. 데리고 살아 보면 알겠지만, 이 세상에 특별한 여자 있는 거 아니다. 결혼하고 애 낳고 살다 보면 여자란 누구나…… ”
형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알았어요, 하고 나는 다시 한 번 애원조로 말했다. 그리고 내 인생 당신에게 헌납할 테니 당신 마음대로 처분하시고, 지금은 제발 잠 좀 자게 해달라는 발악적인 언사를 억누르기 위해 지그시 어금니를 다져 물었다. 잠시 말없이 서 있던 형,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슬그머니 방을 빠져 나갔다. 하지만 형이 방을 빠져 나간 뒤부터 나는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때문도 아니고, 형의 권유 때문도 아니고, 형수에 대한 야속함 때문도 아니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내가 훔쳐보던 한 여자, 그녀가 어둠 속으로 떠올라 나로 하여금 깊은 위무감을 느끼게 한 때문이었다.
다음날 밤, 나는 아주 우연히 백화점 앞의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를 만났다. 전날 밤 형이 내 방을 빠져 나간 뒤부터 날이 환하게 밝아 올 때까지,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내가 창낙한 연극 대본에 그녀와 나의 만남은 분명 ‘우연’이라고 지시돼 있었다. 하지만 극의 전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원한 것이었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우연일 수 없었다. 그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녀는 나의 연기를 무척이나 탐탁찮은 눈빛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음, 무슨 특별한 뜻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고……. ”
그냥, 지난번 가방을 보관해 준 일에 대한 답례로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건 답례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고 그녀는 분명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그 순간 대본은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즉흥 연기를 할 자신이 없어서 대본을 만든 것인데, 그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으니 나로서는 눈앞이 캄캄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글러 버렸구나. 하고 모든 걸 체념하며 나는 아무런 대사도 떠올리지 못한 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도무지 대책이 없겠단 생각이 들어, 그럼, 다음에……. 하고 아주 조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무안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등을 돌렸다. 그러자 저기요, 하고 아주 낮은 목소리롤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녁 대신 커피를 마시면 안 될까요?”
*
그녀가 자신의 옥탑방을 나에게 공개한 건 구월 말경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녀에게 커피를 대접하던 날로부터 한 달쯤 지난 뒤였다. 그녀에게 커피를 대접한 뒤부터 가끔 만나 저녁을 먹거나 술을 함께 마시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감정적 진전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와 나 사이를 좁히기 위해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녀는 매번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깊은 관망의 눈빛으로 나를 무안하게 만들곤 했을 뿐이었다. 뭐가 잘못된 것인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에서 그녀는 도무지 깨어날 줄 몰랐던 것이다.
혹처럼 형네 집에 얹혀 사는 나의 처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에 대한 불만, 수치와 층수에 대한 불안감, 그녀를 훔쳐보는 동안 느꼈던 은밀한 감정 상태, 내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창작한 연극 대본 등등ㅡ그녀에게 나는 아무것도 숨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적극적인 개방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집요하게 자신을 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나이가 스물여섯이고 이름이 이주희라는 것 이외, 그녀에 대해 나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자신이 옥탑방을 나에게 공개했다는 건 전무(全無)가 전무(全部)로 뒤바뀌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주희에게 난 뭐지?”
옥탑방으로 가기 전, 술을 마시던 포장마차에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었다.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표정, 그리고 자신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일방적인 무관심에 지쳐 결별을 염두에 두고 건넨 질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녀를 만났지만 그녀는 나를 만나지 않았다는 허망한 결론. 그래서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겪었던 감정적 당혹감을 나는 그녀에게 솔직하게 털언호고 또한 그것을 정리했다. 나, 이제 더 이상 그대의 빗장 질러진 가슴 앞에서 상처 받고 싶지 않노라.
그때로부터 삼십 분 정도, 그녀와 나는 아무런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포장마차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 결별을 목전에 둔 사람들처럼 그녀와 나는 깊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녀가 버스를 타고 떠나면 다시 포장마차로 들어가 술을 더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등을 보이고 서 있던 그녀가 차도로 내려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택시가 정차하자 돌연 등을 돌리고 내게 다가와 거칠게 손목을 낚아챘다.
“가요!”
삼십 분쯤 지난 뒤, 그녀는 도로와 인접한 주유소 앞에서 택시를 세워달라고 했다. 택시 안에서 입 한 번 열지 않고 내내 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택시가 정차한 뒤에도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를 선뜻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한강을 건넜다는 것, 강북과 강남의 경계지점인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타부타 말 한 마디 없이 여전히 화가 난 듯한 기세로 곧게 뻗어나간 주유소 옆길로 접어들어 저만큼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이십여 미터쯤 걸어가자 좌측에 시장이 나타낫다. 십여 미터쯤 더 걸어가자 지금껏 걸어온 길이 두 갈래의 좁은 골목으로 양분되는 지점에 그리 크지 않은 교회 건물이 나타났다. 우측의 경사진 골목으로 접어들어 다시 십여 미터쯤 걸어간 뒤, 그녀는 다시 한 번 우측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러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팔진 언덕길이 나타났다. 하지만 경사각이 사십도를 상회할 것 같은 그 언덕길을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내처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고난스런 오르막이 절정을 이루는 지점, 놀랍게도 그녀의 거처는 그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의 평지에 지어진 삼층 양옥, 그것도 옥상 위.
지상의 방인가, 천상의 방인가.
그녀의 난폭한 초대로 난생 처음 방문하게 된 옥탑방은 이십오 평 정도의 옥상에다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옥탑방이 십오 평 정도의 공간을 점하고 있었으니 옥상 넓이에서 옥탑방의 넓이를 제한 십여 평 정도의 면적은 고스란히 콘크리트 마당이랄 수 있었다. 하지만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잡은 삼층 건물 옥상,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지상의 밤풍경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경사진 비탈을 따라 집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달동네와 실핏줄처럼 뒤엉킨 좁은 골목길, 그리고 강 건너편으로 내려다보이는 고층 건물과 즐비한 차량의 행렬…… 그것은 보면 볼수록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가련한 고난의 세계가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뒤틀린 심사로 굽어보면 한없이 가소로운 미물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저런 곳에다 발을 딛고 살아왔던가, 줄지어 이동하는 개미 행렬을 향해 오줌 줄기를 갈겨대던 어린 시절이 문득 기억에서 되살아날 정도였다. 내가 공포감을 느끼던 5층-6층-11층-17층 같은 곳에서는 전혀 느껴 보지 못한 감정, 그리고 비로소 되새겨지는 인간의 미물스러움.
옥탑방의 내부는 반으로 나뉘어 왼편에는 방이 있었고, 오른편에는 주방과 화장실이 있었다. 엷은 화장품 냄새가 배어 있는 방에는 작은 화장대와 상(床), 그리고 옷장이 놓여 있었다. 몇 가지의 취사 도구가 눈에 띄는 주방을 먼저 보고, 곧이어 주방을 통해 방으로 들어간 뒤에 나는 그녀가 가슴에 빗장을 지른 이유가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현대판 가나안, 풍요로운 물질의 바다와 같은 백화점에서 가장 화려한 제복을 입고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앉아 근무하는 상징적인 존재ㅡ그녀가 이렇게 옹색한 옥탑방에다 둥지를 틀고 있으리라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으랴.
할말을 잃은 표정으로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와 마찬가지, 나도 할말이 없어 반쯤 고개를 들고 망연한 눈빛으로 맞은편 벽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와 내가 교감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나마 나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녀는 나와 온전하게 교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어야겠으니 잠시만 밖으로 나가 있어 달라고 그녀가 자조적인 표정으로 말했을 때, 교감에 대한 나의 확신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십 분쯤 지난 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콘크리트 마당으로 나왔다. 그리고 옥상을 둘러싼 낮은 에움벽 앞에 뭍어서서 담배를 피우며 지상을 내려다보는 내 옆으로 다가와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한없이 미물스러워 보이는 인간의 세계, 그리고 가련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인간들의 자만심을 되새김질하고 있다고 나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팔짱을 끼고 지상을 내려다보던 그녀, 나와는 견해가 다르다는 듯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 민수씨가 한 말은 신들에게나 어울리는 거예요. 여기 서서 그런 시선으로 세상을 굽어보면…… 저 낮은 곳으로 두 번 다시는 내려가기가 싫어져요. 저 가파른 언덕길을 하루에 두 번씩 힘겹게 오르내리며 내가 무엇을 꿈꾸는지 아세요? 지금 민수씨가 말한 저 가련한 고난의 세계, 저곳이 아무리 미물스럽고 속물스럽다고 해도…… 그래도 저곳으로 내려가 편안하게 안주하고 싶다는 게 아주 오래 전부터 키워 온 내 꿈이예요. 저곳의 주민이 되고, 저곳의 주민들처럼 미물스럽고 속물스럽게 사는 거…… 그게 나에게 남겨진 마지막 꿈이라구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꿈?”
젖과 꿀이 흐르는 현대판 가나안, 물질로 구현된 꿈의 성전을 떠올리며 나는 물었다. 꿈에 주린 사람들을 성전으로 안내하는 그녀의 꿈, 어쩌면 옥탑방처럼 높은 곳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을 지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요컨대 정신적 측면을 무시하는 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지상의 주민이 되어 미물스럽고 속물스런 세계에 안주한다는 거…… 어쩌면 인간적인 타락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의 속성이라면….. 어떤 식으로도 난 그걸 부정하고 싶지 않아요. 세상을 착하고 올바르게 산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죠?”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신들이 노여워할 만한 꿈이로군.”
“그래요. 신 같은 건 믿어 본 적도 없으니까. 설령 내 꿈이 사악하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그걸 실현하기 위해 난 꿈을 꾸듯 현실을 견디고 있을 뿐이니까요, 아침마다 이곳을 내려가 세상에 머무는 동안, 내가 불완전한 지상의 주민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아세요? 그래서 하루 일을 끝내고 이곳으로 올라오면…… 그래요, 여기가 마치 내 꿈이 자라는 온상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내 사악한 꿈이 자라는 비밀스런 온상…… 내가 이곳을 민수 씨에게 보여주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죠?”
“글쎄, 따뜻한 배려는 아닌 것 같군.”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나는 얼버무렸다. 불완전한 지상의 주민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아세요?ㅡ그녀의 물음에서 형언할 길 없이 깊고 드넓은 공감대가 느껴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불완전한 지상의 주민이면서도 그것을 절실하게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온 나의 무지가 아프게 되새겨진 때문이었다.
“민수씨가 나에게 커피를 사 주던 날…… 백화점의 5층 매장으로 올라가는 게 두려워서 나를 훔쳐보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아주 잠시 나는 내 꿈을 잊고 있엇어요. 회사가 있는 11층과 형네 집이 있는 17층으로 올라가는 일이 죽기보다 싫다는 얘기까지 듣고 나서…… 어쩌면 이 사람도 나처럼 지상의 주민이 되지 못해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나 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하지만 내가 민수씨를 아무리 이해한다고 해도…… 그래도 나는 내 꿈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나는 민수씨처럼 착하지도 않고…… 그렇게 착하게 살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거든요. 나를 만나는 건 상관 없지만, 나의 꿈 때문에 민수씨가 상처 받게 될까 봐….. 그래서 오늘 민수씨에게 내 꿈의 온상을 보여 주는 거예요. 보세요. 민수씨가 훔쳐보던 그 여자가 아직도 나라고 생각되나요?”
묻고 나서 그녀는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섰다. 상대를 올바르게 직시하라, 라는 말을 그녀는 몸짓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꿈에서 완전히 깨어난 듯한 표정, 그리고 세상을 가감 없이 직시하는 듯한 눈빛이엇다. 언제나 꿈을 꾸듯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에게 그토록 뚜렷한 주관이 있었던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냉철한 말솜씨까지 되새겨져 나로서는 어떤 방식으로도 선뜻 응대를 할 수 없었다. 낯선 이방이나 낯선 별에서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접하게 된 것처럼, 그때부터는 그녀가 아니라 내 표정이 사뭇 몽롱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참을 먹먹하게 서 있던 끝, 그녀가 아니라 내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나는 이렇게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주희가 날 이해할 필요도 없고, 내가 주희를 이해할 필요도 없어. 다만 한 가지, 내가 주희의 꿈을 이해하면 되는 거야. 간단하잖아.”
*
그 해 시월 한 달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간이었다. 그것은 물론 내가 그녀의 꿈을 이해하겠다고 말한 데서 생겨난 일종의 묵계가 반영된 결과였다. 그녀의 꿈을 이해하겠다는 말이 그녀와 나를 사뭇 이상스런 관계로 몰고 간 건 사실이지만, 남녀의 모든 만남이 사랑을 전제로 지속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그녀의 꿈을 얼마든지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관계, 그것이 혹이 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특별하지 않은 그녀와 나의 관계, 그것이 두 사람 사이를 의외로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보다, 서로가 원할 때 부담 없이 만나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걸 두 사람은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애인보다 못하지만 애인보다 낫고, 친구보다 못하지만 친구보다 나은 관계ㅡ그게 뭔 줄 아냐고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퀴즈를 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정답 대신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와 나를 가리켰다. 우리, 라고 간단히 묶어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월 초순경, 나는 그녀의 옥탑방 밖에다 아담한 별장를 만들어 주었다. 회사 창고에 쌓여 있는 레저 용품 한 세트를 가져가 옥상의 콘크리트 마당을 근사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었다. 이삼인용 텐트를 치고, 텐트 옆에는 파라솔이 곁들여진 레저 테이블을 설치했다. 그리고 레저 테이블 옆에는 휴대용 바비큐 그릴을 놓고, 텐트 바닥에는 에어 매트까지 깔았다. 버너와 코펠, 도마와 식칼, 양념통과 바람막이까지 있었으니 달리 더 뭐가 필요하랴.
내가 만들어 준 별장을 그녀는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했다. 퇴근할 때마다 백화점 지하 식품부에 들러 먹거리를 사 왔고, 그것을 조리해 레저 테이블에 앉아 먹으며 이를 데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곤 한 것이었다. 날씨가 맑은 밤에는 알루미늄 판지를 바닥에 깔고 옥상에 누워 밤하늘의 별자리를 올려다보기도 하고, 비가 내리는 밤에는 텐트 안에 누워 음악을 감상하듯 빗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기온이 떨어지는 깊은 밤에는 바비큐 그릴에다 숯불을 피워놓고 마주앉아 오징어나 햄을 구워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내가 대학 때 즐겨 읽던 책 한 권을 그녀에게 선사한 것은 그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처음 옥탑방을 방문했을 때, 그리고 그녀의 꿈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뇌를 맴돌던 어떤 기억이 불현듯 그 책의 내용과 맞물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내게 한 때문이었다. 가련한 고난의 세계가 아무리 미물스럽고 속물스럽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속성이라면 어떤 식으로도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던 그녀의 말ㅡ그것이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는 신화 속의 한 인물을 불쑥 떠오르게 한 것이었다.
끊임없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는 끔찍스런 형벌에 처한 인간의 이야기ㅡ《시지프의 신화》를 선사하던 날, 나는 텐트 안에 매달아 둔 가스등 아래 누워 그녀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하지만 내가 책을 덮었을 때, 반듯하게 누워 있던 그녀가 몸을 뒤집으며 다시 한 번만 읽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읽어 나갈 때, 그녀는 내용을 음미하듯 부분적인 재독을 원하기까지 했다. 간신히 재독을 끝냈을 때, 그녀는 내 손에 들려 있던 책을 받아들고 여기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고 말하며 특정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무력하고도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그의 고뇌를 이루었을 명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킨다. 멸시로써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책을 선사하던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옥탑방에서 잠을 잤다. 하지만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으니 색다른 일이 생겨날 리 없었다. 한 번만 안아 봤으면 좋겠다고 내가 어둠 속에서 말했을 때, 젖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그녀는 내게 등을 보이고 돌아누웠다. 그리고는 사마귀처럼 안아 줘, 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사마귀처럼 안아 달라는 말, 그게 무슨 뜻인지를 선뜻 알아차리지 못해 나는 잠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거렸다. 그런 뒤에 비로소 그것의 중의적인 의미를 알아차리고 허전한 심정으로 그녀의 등을 껴안았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내 쪽으로 돌아눕지 못하는 그녀, 그리고 그녀의 꿈을 존중하기 위해 사마귀처럼 등을 껴안아야 하는 나ㅡ그것도 ‘한 쌍’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생물의 형태였을까.
그날 이후, 나는 이틀 걸러 한 번씩 그녀의 옥탑방에서 잠을 잤다. 사마귀처럼 등뒤에서 그녀를 껴안고 자기도 하고, 그녀의 요구로 《시지프의 신화》를 읽어 주다가 내가 먼저 곯아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잦은 외박에 대해 형과 형수는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질책은커녕, 은근한 기대감이 어른거리는 눈빛으로 그들 부부는 내가 먼저 무슨 말인가를 꺼내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감과 나의 옥탑방 출입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어디 숨겨 놓은 애인이라도 있나 보죠? 이렇게 자주 외박을 할 정도면 보나마나 그렇고 그런 사이일 텐데…… 우선 동거부터 시작하고 나중에 식을 올려도 괜찮을 거 아닌가요? 내 친구 중에도 그런 애가 있었는데, 사 년 만에 식 올리고 이젠 아주 잘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선 저질러 놓고 나중에……”
시월 마지막 날 아침,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형수가 꺼낸 말이었다. 우선 저질러 놓고 나중에 어쩌란 것인지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듣고 나서 나는 말없이 숟가락을 놓고 형네 집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회사로 가는 동안 나는 형수의 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의 외박을 자기 편할 대로 확대 해석하고, 그것도 모자라 교사범 같은 표정으로 뭔가를 저지르라고 부츠기던 형수의 저의를 환히 꿰뚫어 보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날이 바로 월말 정산을 하는 날이라서 아침부터 지레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치로 환산되는 인간의 가치, 그것이 곧 월말 정산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자넨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세상을 사나? 영업사원이 아니라 벌레가 꿈틀거리고 다녀도 이보다는 실적이 나을 거야. 한두 달도 아니고 벌써 석 달째 이 지경이니 자네 형이 내 친구가 아니라 내 할아버지라 해도 분통이 터질 일 아닌가! 형은 또랑또랑한데 도대체 아우는 왜 이 모양이지? 남의 집안 문제를 놓고 내가 가타부타 떠들 입장은 못 되지만…… 대학 공부까지 시켜 준 형한테 얹혀 사니까 아직 등 시려운 줄 모르는 모양이지? 자네에게 말은 못해도, 자네 형도 자네 때문에 꽤나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것쯤은 알아 두라고. 형이나 내가 자네에게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자산사업가가 아닌데…… 기생충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양심이 있어야 할거 아냐, 양심!”
내가 작성한 정산서를 휙, 사장은 허공에다 집어던졌다. 그리고 공중에서 두어 번 너울거리던 그것이 미처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사뭇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손을 훼훼 내저으며 그만 나가 보라는 시중을 했다. 하지만 아예 의자까지 돌려 앉은 사장의 등뒤에서 나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무능한 인간으로 취급하던 나를 이제는 벌레와 기생충을 취급하느냐, 그런 걸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옥탑방의 주인, 그녀도 또한 나를 벌레나 기생충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아뜩하게 뇌리를 스쳐 간 때문이었다.
불완전한 지상의 주민.
행복한 시월이 막을 내리던 그날, 나는 세상의 어느 곳에도 실질적으로 편재되지 못한 나의 초상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퇴근을 하고 회사를 빠져 나온 직후부터, 서편 하늘에 번진 석양빛을 이마로 맞받으며 무작정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이 끝나는 마지막 지점, 지상의 온갖 미물스러움과 속물스러움이 영원히 소멸되는 극단적인 지점이 매순간 나의 발에 밟히는 것 같았다. 배회하며 지나치는 지상의 모든 풍경에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여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 가지, 신화 속의 시지프처럼 신들의 멸시를 오히려 멸시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부단한 용기가 나에겐 없었을 뿐이었다.
누구를 위한 멸시인가.
밤 열 시 반경부터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포장마차로 들어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벌레와 기생충을 안주 삼아 쓰디쓴 비관의 술을 들이키는 멸시의 시간이 되어서야 나의 정신은 명징해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나와 무관하게 느껴지는 세상, 아직 일말의 가능성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나는 서서히 가슴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친구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존재에 대한 기대감ㅡ그것이 설령 멸시받아 마땅한 그리움이라 해도 나로서는 더 이상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다른 건 모르겠으되, 시월 한 달 동안 내가 옥탑방에서 느꼈던 내밀한 행복감까지 벌레나 기생충의 몫으로 양보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소주를 마시고 밖으로 나와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내가 올라가고자 하는 저 가파른 언덕 위, 그곳에 지상으로 내려오는 꿈을 고수하고 사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올라가고자 하는 나의 꿈과 내려오고자 하는 그녀의 꿈. 그것이 지극히 대조적이라는 아이러니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꿈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 억눌렀던 나의 진실, 그리고 운명을 멸시하고 그것에 저항하고 싶은 격렬한 용기가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 갔을 뿐이었다. 아, 행복했던 시월 한 달, 내가 그녀를 진정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던가?
가라!
옥탑방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깊은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그래서 자는 걸 깨운 거냐고, 나는 어둠 속에 서서 조심스럽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그냥……. 하고 그녀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왜 잠이 오지 않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여기, 내 옥탑방에서 민수 씨가 보이지 않는 흔적을 참 많이 남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몸을 뒤치락거리기도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그러면서 혹시나 오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어. 민수씨.”
자신을 스스로 원망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무너지듯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양 무릎을 세우고 거기다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여기말고는 도무지 갈 데가 없었어. 하고 모든 걸 체념한 듯한 어조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때로부터 몇 분, 그녀와 나 사이에는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와 내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다는 막막한 체공감이 느껴질 무렵, 어둠 속에서 양팔을 벌리고 그녀가 나를 향해 이상한 동작을 취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민수씨…… 괜찮으니까 이리 와.”
그것은 사마귀가 사무귀에게 나타내는 미물스런 구애의 동작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마귀처럼 등을 보인 게 아니라 사람답게 가슴을 열고 나를 부르는 그녀의 동작을 확인하고 나서도 나는 선뜻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에게 자신의 가슴을 처음으로 열어 주었다는 것, 그리고 사람으로서의 포옹을 최초로 허락했다는 것에 감동을 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도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느껴진 때문이었다. 옥탑방에 들어차 있던 오래된 어둠과 적막, 그리고 그녀의 희망이 일순에 무너져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으랴.
*
그녀가 현실에서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춘 건 십일월 초순경의 어느 날이었다.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토요일 밤이었고, 그녀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건 월요일 오후였다. 매장을 돌기 위해 그녀가 근무하는 백화점 입구에 당도한 월요일 오후, 그녀가 앉아 있어야 할 안내석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가 무척이나 밝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나는 얼핏 근무처 변경 같은 걸 연상했었다. 하지만 5층 매장으로 올라가 볼일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나는 안내석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소재를 물었다. 그러자 안내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반짝 웃음을 지어보이며 아, 이주희씨는 지금 휴가중이거든요. 하고 붙임성 있게 말했다.
5일 동안의 휴가.
이유가 뭐냐고 다시 묻자, 그건 저도 모르죠, 하고 새로운 안내원은 여전히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토요일 밤에도 휴가에 관한 얘기가 없었는데 갑자기 5일씩이나 휴가를 받은 이유가 뭘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오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퇴근을 하자마자 곧바로 그녀의 옥탑방으로 가보았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휴가의 근거가 될 만한 단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녀가 없는 옥탑방의 정적을 감내하기 어려워 나는 비탈진 언덕길을 내려가 몇 병의 소주와 안주를 사들고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주인 없는 빈 방을 지키며 혼자 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가끔 옥상으로 나가 레저 테이블에도 앉아 보고, 에움벽 앞에 붙어서서 막막한 눈빛으로 지상의 밤풍경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런 디딤판도 없이 홀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에서 나는 좀체 벗어날 수 없었다. 낮의 숙명이 밤이고 빛의 숙명이 그림자라는 말, 오직 그녀의 부재감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인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밤이 없는 낮과 그림자 없는 빛의 끔찍스러움, 상상해 보라.
금요일 밤, 자정 무렵이 거의 다 되어서야 그녀는 옥탑방으로 돌아왔다. 월요일 밤부터 시작된 나의 막막한 기다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깨에 멘 가방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그녀는 한없이 몽롱한 표정으로 벽에 등을 기대고 힘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하지만 움푹하게 가라앉은 두 눈과 피곤에 지쳐 늘어진 그녀의 어깨를 보면서도 나는 선뜻 말문을 열 수 없었다. 숙명의 전모를 간파하지 못하는 인생의 장님, 그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일요일에 엄마가 죽었어. 그래서 시골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여동생을 이모네 집에 맡기고 왔어. 하지만 전생의 일처럼…… 지난 며칠 동안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져. 정말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다 했던 건지…… 지금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애.”
“내가 누구인지는 알겠어?”
그 순간,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질문을 건넸는지 모를 일이었다. 막막한 기다림에 나도 또한 지칠 대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울컥, 나도 모를 역겨움이 치밀어 오른 것인가. 나의 질문을 받고 나서 그녀는 벽에 기댔던 머리를 들고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굳은 표정으로 내가 담배를 피워 물었을 때, 초점을 상실한 듯하던 그녀의 두 눈에는 어느새 맑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여 있었다.
“민수씨,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어째서 민수씨가 나에게 무엇이라도 되는 양…… 왜 자꾸 그런 식으로 행동하느냔 말야. 민수씨가 누구인지…… 그런 걸 내가 왜 알아야 하지? 난 민수씨가 누구인지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정말, 진심으로 그런 건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그러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 그리고……. 이제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민수씬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고…… 나도 민수씨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여자야. 그러니까, 제발…….”
“제발, 어쩌라는 거지? 저 낮은 지상의 주민이 되어 편안하게 안주하고 싶어하는 주희의 꿈을 방해하지 말고 이제 그만 눈앞에서 꺼져 달라, 이건가? 진실도 없고 감정도 없고, 오직 목적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그 파렴치한 꿈 말인가? 그걸 위해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서 정말 행복하겠군. 하지만 말야,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아 둬. 그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기만하고 사느니, 차라리 꿈이 없이 사는 게 훨씬 나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야. 꿈을 위해 현실을 깡그리 부정하겠다는 거, 이미 꿈의 노예가 되었다는 뜻 아닌가?”
그녀가 오랫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을 허물어뜨리는 심정으로 나는 정신없이 지껄여대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옥탑방에 대해 일말의 미련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리고 뒤돌아서서 아쉬워하지 않기 위해 내 스스로 무너지는 탑이 되고자 한 것이었다. 꿈꾸는 자를 꿈꾸는 어리석음으로 되풀이하느니, 차라리 잔혹한 파괴자가 되어 꿈의 가능성까지 짓밟아 버리는 게 훨씬 현명한 일 아니겠는가.
그날 이후 나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업무를 위해 백화점으로 들어갈 때도 그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정문 대신 건물 오른편의 옆문을 이용했다. 뿐만 아니라 먼 거리에서 시선을 맞닥뜨기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장 중앙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뒤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5층으로 올라가곤 했다.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일 주일이 지나도록 내 마음에는 별다른 동요의 조짐이 일어나지 않았다. 겨울로 가는 가을의 막바지, 떨어진 가로수 잎새가 바람에 나뒹구는 을씨년스런 거리 풍경이 차라리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것 같아 자주 창 밖으로 눈길을 돌리곤 했을 뿐이었다.
십일월.
조락이 끝나 가는 세상의 풍경을 눈여겨보며 나는 아주 가끔《시지프의 신화》를 떠올리곤 했다. 신화가 아니라, 산정에서 끊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바위가 아니라, 되풀이되는 시지프의 절망이 아니라, 그것의 영원한 재현을 생각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인간적인 숙명성으로 몽타주된 시지프들의 육체에서 나는 더 이상 신화 속에서와 같은 육체적 긴장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느 누가 찡그린 얼굴, 바위에 부벼대는 뺨, 진흙에 덮힌 돌덩이를 멈추려고 버틴 다리, 그리고 바위를 받아 안는 팔과 흙투성이의 믿음직한 손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거세당한 시지프들, 산정을 향해 바위를 밀어올리는 불굴의 의지를 상실한 시지프들이었다. 신을 향한 멸시를 통해 인간의 운명을 극복하려는 반항적인 분투가 사라지고, 이제 지상에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멸시가 범람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희망 없이는 노동을 투자하여 산정으로 올라가지 않으려 하고, 어느 누구도 도로(徒勞)의 절망의 숙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것이었다. 주어진 형벌의 바위도 부정하고, 지상에 안주하기 위해 인간의 숙명까지 부정하는 가련한 시지프들의 지옥.
내가 무슨 근거로 그녀의 꿈을 멸시했던가.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나보다 먼저, 신화나 관념이 아니라 순수한 삶을 통해 지상의 불모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체념과 비관으로 뒤틀린 시지프들의 세계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꿈에 집착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지상의 주민으로 편재되고 싶다는 그녀의 꿈은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러 나는 슬그머니 수치심을 느끼고 말았다. 미물스럽고 속물스런 세계로의 편재가 아니라 인간적인 전락과 절망이 바로 그녀가 말하는 꿈의 요체라는 걸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기 형벌의 바위를 밀고 올라간 산정, 그곳이 발 그녀의 옥탑방이 아니겠는가.
그날 밤, 나는 거세당한 시지프의 심정으로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밤 열 시경, 처음으로 행복한 시지프를 꿈꾸며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갔다. 하지만 그녀의 옥탑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고, 그녀는 그 시간까지 귀가하지 않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서 기다릴까, 잠시 망설였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언덕길을 내려와 한동안 주변을 배회하다가 열한 시경에 형네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다음날, 나는 백화점 일층의 먼 발치에서 그녀를 훔쳐보았다.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자세로 그녀는 앉아 있었지만, 외관에서 풍겨나오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내가 그녀를 처음 훔쳐보던 무렵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인 상태로 변해 있는 것 같았다. 그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현실에 대한 단호함처럼 여겨져서 나는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을 다시 한 번 추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 앞으로 선뜻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서늘한 거부의 기운 같은 것ㅡ안내가 아니라 뭔가를 철저하게 은폐하기 위해 그녀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며칠 동안,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심정으로 나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밤이면 옥탑방 근처를 배회하며 불이 켜지거나 꺼진 방을 올려다보았고, 낮이면 백화점 매장의 먼 발치에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훔쳐보았다. 일정하던 그녀의 귀가 시간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규칙해지고 있었고, 낮 동안에 훔쳐보는 그녀의 모습은 심해선 밖의 한 점 섬처럼 깊고 막막한 단절의 가운데 빈틈없이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십일월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어느 날, 그녀는 드디어 자기 운명의 나락을 맞이한 사람처럼 밤이 새도록 옥탑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외박한 다음날, 나는 처음으로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출근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동이 틀 무렵까지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다가, 새벽 냉기를 견디기 어려워 그녀의 옥탑방으로 들어가 잠시 몸을 녹이려 한 게 화근이 된 것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어느덧 오전 열한 시가 지나 있었고, 밖에는 추적추적 초겨울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 출근 시간을 놓쳤다는 것도, 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나는 주검처럼 자리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옥탑방이 아니라 옥탑방의 흔적 위에 누워 있는 것 같다는 상실감, 그리고 심신을 빈틈없이 뒤덮어 오는 그녀의 존재감을 떨쳐 버릴 수 없어서였다.
그날 어둠이 내릴 때까지 나는 그녀의 옥탑방에서 누워 있었다. 전화도 없고, 냉장고도 없고, 보일러도 작동하지 않는 을씨년스런 옥탑방에 어둠이 밀려들자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와 같은 적막감이 사방에서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서둘러 지상으로 내려왔다. 따뜻한 정감이 느껴지던 방이 아니라 궁핍이 독기처럼 번져 있는 방에서 황망스럽게 쫓겨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언덕길을 내려오며 나는 몇 번씩이나 고개를 쳐들고 옥탑방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거처가 아니라 그것의 배경을 이루는 가난, 그것의 실체를 그날 처음으로 목격하고 또한 실감하게 된 것이었다.
언덕 밑의 포장마차에서 나는 우동 한 그릇을 시켜 먹고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그곳에 오래 눌러앉아 있지는 못했다. 인줏빛 포장을 두들겨대는 빗소리에서 느껴지는 종말감을 견디기 어려워 간신히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인근의 구멍가게로 들어가 비닐 우산과 소주 두 병을 사들고 다시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갔다. 하지만 그녀의 옥탑방으로 다시 들어가지는 않았다. 비닐 우산을 받쳐 들고 삼층 양옥 맞은편 담벼락에 붙어 서서 간간이 소주병을 기울이며 추위를 잊으려 했을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비는 이십 분쯤 지난 뒤부터 슬그머니 멎었지만, 시각을 다투듯 기온은 빠르게 낮아지고 있었다. 햇살 따사롭던 시월, 그리고 그 기간 동안의 행복이 절로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밤 열 시 반경부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닐 우산을 펼쳐 들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들 때, 한없이 굼뜬 동작으로 그녀가 우산도 없이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오는 게 보였다. 골목 중간 지점에 세워진 보안등빛을 사선으로 지나친 비가 고스란히 그녀의 정수리로 내려앉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언덕 위의 어둠 속에 서서 꼼짝 않고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술을 마신 것인가, 아주 가끔 그녀는 돌로 쌓아 올린 좌측의 축대를 손으로 짚으며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그녀가 언덕 위로 올라왔을 때, 나는 비닐 우산을 받쳐들고 천천히 그녀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그녀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주변의 주택가에서 밀려 나온 희미한 불빛으로 길을 가로막은 사람이 누구라는 걸 그녀는 이내 알아차린 것 같았다. 자신이 서 있던 우측 담벼락에다 등을 기대고 하아, 그녀는 소리나게 한숨을 내뿜었다. 술을 꽤나 많이 마신 모양, 담벼락에다 등을 기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상체는 연신 흔들리고 있었다.
“자……. 써.”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비닐 우산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건네받지 않고 취기가 배어 있는 몽롱한 눈빛으로 히죽이 웃음을 쥐어 주고 나서 나는 다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부슬거리는 비를 맞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 어젯밤부터 이곳에 있었어.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너무 추워서 새벽에 옥탑방으로 들어갔는데…… 그만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어. 그래서 오늘 하루 결근하고 다시 이곳에서 주희를 기다리고 있었어. 어제 오늘만 그랬던 게 아니고…… 며칠 전부터 이곳을 배회하며 주희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거야. 다시 만난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거…… 물론 알고 있어. 다만 한 가지…… 내가 설령 사마귀였다고 해도…… 그래, 부담스럽게 들린다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사마귀가 한 말이라도 무시해도 괜찮아.”
“……..”
“나, 주희를 만나던 모든 순간에 주희를 사랑했었어. 주희를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는 거……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주희의 꿈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그것을 실현할 수 없는 나의 현실을 아파하고 있었다는 거…… 이제 알겠어?”
“…….”
그 순간, 그녀의 손에서 비닐 우산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고개를 떨구자 비에 젖은 긴 머릿결이 무겁게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이어 담벼락에 기댔던 등을 떼고 세차게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사뭇 위태로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와락 목을 끌어안고 격하게 오열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민수씨, 이러지 마…… 제발, 이제 더 이상 나를 흔들리게 하지 마.”
*
그 해 십이월은 나에게 기이한 인내와 체념을 동시에 가르쳤다. 십이월이 가르친 게 아니라 십이월을 관통하며 내 자신에게 스스로 배우게 된 게 바로 그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랑한다는 말과 사랑하는 행위가 별개의 문제로 대두될 때, 인간이 스스로에게 내릴 수 있는 처방전이 달리 무엇이랴.
십이월로 접어든 뒤부터 그녀의 외박은 더욱 잦아지기 시작했다. 비 내리던 그날 밤,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뜨거운 재회는 이미 효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날 밤 내가 그녀에게 예견했던 것처럼, 결국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말을 하자면, 내가 그녀의 옥탑방에서 혼자 밤을 지새는 날이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변화라면 변화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외관상의 안정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 해 십이월에 변하지 않은 것, 오직 그 해 십이월뿐이었으리라.
그녀의 잦은 외박에도 불구하고 내가 옥탑방을 자주 찾게 된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나의 잦은 외박을 독립의 전조로 생각하던 형네 부부, 그것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뒤부터 노골적으로 나를 경원시하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형네 집으로 들어가면, 밖에도 잘 데가 있는데 굳이 남의 집으로 들어와 가정의 평화를 깨는 이유가 뭐냐, 하는 듯한 눈빛으로 노골적으로 나를 경원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퇴근을 하고 나면 오늘은 어디로 갈까, 황혼병 환자처럼 마음의 정처를 정하지 못한 채 오래오래 거리를 배회하거나 술을 마시곤 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다가 결국 옥탑방 쪽으로 발길을 돌리곤 한 것이었다.
“이젠 이 방의 주인이 민수씨인 것 같애. 하지만 내가 민수씨 방에 잠시 들렀다 가는 것 같아서 오히려 마음은 편안해. 여기가 내 방이라고 생각하면…… 그래, 외박을 했다는 것 때문에 일너 순간에 마음이 무척 불편하게 느껴질 것 같애.
그러니까 민수씨도 이젠 이 방을 자기 거라고 생각해. 누가 주인이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어느 날 이른 아침, 출근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러 집으로 들어온 그녀가 한 말이었다. 내가 느끼던 것과 너무나도 흡사한 말이라서 일견 신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가 옥탑방에 머무는 시간보다 내가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실제로 많았기 때문에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터였다.
그녀가 외박하고 들어오는 아침마다, 나는 그녀의 온몸에 타인의 체취가 배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턱없이 시달리곤 했다. 막연한 추측과 불온한 상상이 만들어낸 불유쾌한 욕망의 그림자를 떠올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밤을 보내고 왔는지에 대해 나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물어 본 적이 없었다. 끈덕진 인내심이나 너그러운 포용력 때문이 아니었다. 온전한 지상의 주민이 되고 싶어하는 그녀의 꿈을 물질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는 나의 처지, 그것에 대한 속 깊은 체념이 용기와 분노와 열정을 빈틈없이 마취시켜 버린 때문이었다. 사랑의 감정에 스스로 마취제를 투여하는 비루한 청춘의 초상.
이게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밤, 나는 어둠 속에 누워 어떤 식으로든 내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수도 없이 몸을 뒤치락거렸다. 하지만 사랑의 이름으로도 증오의 이름으로도 나는 끝끝내 내 자신을 설득할 수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내가 나를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자신을 진짜 기생충으로 단정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인내가 서서히 약효를 잃어 가던 무렵이라서 였을까. 기생충을 떠올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진저리가 쳐지고 욕지기가 치밀어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 무렵부터 그녀는 아예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째서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지, 물론 나로서는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그녀가 온전한 지상의 주민으로 전입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부정할 수 없는 확신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그녀의 꿈을 물질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누군가의 출현.
백화점에는 여전히 근무하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근무하는 그녀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그녀가 완전히 별개의 인물처럼 느껴져서 나는 여전히 정문 출입을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을 때, 이제 쓰디쓴 인내의 시간이 막을 내렸다는 걸 알리기 위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달리 아무런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내일 집으로 올 수 있어?”
“왜?”
“그냥, 할말도 있고……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모르겠어.”
“…….가능하면 와.”
“몰라. 기다리진 마.”
그것이 그녀와 내가 이 세상에서 주고받은 마지막 말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던 다음날 밤, 작은 케이크와 술, 그리고 그녀에게 선물할 털장갑을 준비하고 나는 새벽까지 기다렸지만 그녀는 끝내 옥탑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반드시 오리라고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마지막 의식(儀式)까지 무산되었다는 게 못내 허전하고 아쉽게 느껴진 것도 또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최대한 축약한 짧은 편지 한 장을 남겨 놓고 나는 조용히 옥탑방을 떠났다.
지상을 꿈꾸게 하는 옥탑방
몸이 떠나도 영혼이 이곳에 머물 수 있다면
사랑의 깊이가 높이로 깃들여 있는 곳
행복하라고, 부디
흐린 날빛 속에서 신기루를 바라보듯
오래오래 그대 이름 잊지 않으리
*
그녀가 백화점을 그만두었다는 걸 내가 알게 된 건 다음에 일월, 신정 연휴를 끝내고 첫 출근을 하던 날 오후였다. 백화점 옆문을 통해 매장으로 올라갔을 때, 매장의 판매 직원 아가씨가 서랍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 나에게 내밀며 야릇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내로 근무하던 아가씨하고 잘 아는 사인가요?”
“그건…… 왜 묻죠?”
“그 아가씨가 연말에 백화점을 그만두면서 이걸 남기고 갔으니까 하는 말이죠. 보통 사이라면 이런 걸 남기겠어요?”
“보통 사이가 아니라면 직접 만나면 되지 이런 걸 머하러 여기다 맡기겠어요?”
얼결에 그렇게 응대하긴 했지만, 그녀가 백화점을 그만뒀다는 얘기가 나에게는 사뭇 충격적으로 들렸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왜 그만뒀는지 아세요?”
“흠, 안내 직원이 백화점의 꽃이니까 어디 좋은 데로 팔려 갔나 보죠 뭐. 그런 걸 내가 무슨 수로 알겠어요?”
5층에서 내려와 정문 근처로 다가가자, 정말 안내석에 앉아 있는 직원이 바뀌어 있었다. 언제나 꿈을 꾸듯 몽롱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허전하게 느껴져서 나는 뜻없는 눈길로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화려한 물질의 바다, 젖과 꿀이 흐르는 현대판 가나안에서 이제 그녀처럼 깊은 단절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의 모습을 좀체 발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그녀의 족적을 찾아가듯, 백화점을 빠져 나와 나는 정신없이 택시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한 것일까.
불완전한 지상의 주민이 살던 터전, 그녀의 옥탑방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햇살 한 점 밀려들지 않는 방안에서 내가 확인한 것이라곤 깊은 정적과 냉기, 그리고 한없이 비현실ㅈ거인 공허감 뿐이었다. 그녀의 흔적으로 남겨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녀가 정말 이곳에 살았던 것일까, 나의 기억을 스스로 의구스러워해야 할 정도였다. 서로를 사랑했기 때문에 오히려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한 쌍의 사마귀 이야기ㅡ누가 만들어 낸 동화였을까.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을씨년스런 공간, 나는 그곳을 더 이상 옥탑방을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경험한 기억은 어느 것 한 가지도 망각의 늪으로 밀어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찬찬히, 나는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을 되새기며 또 다른 방 한 칸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옥탑방에 아로새겨진 수다한 추억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방법, 내 마음에 또 다른 옥탑방을 만드는 일말고 달리 무엇이 있으랴.
그녀가 어둠 속에서 팔을 벌려 최초로 포옹을 허락하던 밤의 기억이 묵연하게 뇌리를 스쳐 갔다. 멸시로써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나에게 처음으로 팔을 벌리던 근라 밤에 나는 그녀의 가슴에다 운명의 비수를 꽂는 게 옳았으리라. 왜 그러지 못했던 것일까. 때늦은 절박함으로 진저리를 치며, 초점이 한껏 흐려진 눈빛으로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숙명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는 가련한 인생의 장님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점자(點字)를 더듬듯, 나는 비로소 그녀의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죄스런 마음으로 당신이 남기고 간 시를 읽었습니다. 짐을 정리하다 말고 한참을 주저앉아 울었지만, 내가 당신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을 망설이다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당신에게 아픔과 절망만 경험하게 한 옥탑방을 이제 나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꿈꾸던 것이었던가, 나는 아무것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옥탑방에서 보낸 시간들이 훨씬 진실했었다고 아프게 추억하는 일이 생기거나, 지상에서의 삶을 허망하게 끝내고 다시 옥탑방으로 올라가는 일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돌아가신 엄마는 인생이 서천의 구름 같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찌든 가난에는 끝끝내 초연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래가 어떻게 변하든, 지금 내가 당신에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진실은 있습니다. 나의 옥탑방에 발을 들여놓았던 유일무이한 사람, 그리고 나의 찌든 가난을 속속들이 들여다본 첫 번째 남자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많은 면에서 당신은 나에게 첫 번째였지만, 첫 번째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의 인생을 나의 옥탑방에다 가두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평생 옥탑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당신과 나의 인생, 상상해 본 적 있나요?
이렇게 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옥탑방은 당신과 나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헤어질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은 나에게 영원히 첫 번째 남자로 남겨질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나도 또한 당신에게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는 여자로 남고 싶습니다. 당신이 설령 나를 원망한다 해도, 나도 또한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런 바람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내게 선물한 《시지프의 신화》, 당신이 생각날 때마다 읽고 또 읽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추억이 아로새겨진 옥탑방, 오래오래 세상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빌겠습니다. 어쩌다 그 부근을 지나치게 될지라도, 아름다운 추억의 성전으로 그곳을 올려다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도 또한 행복한 미래가 함께하길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주 우연히 지상에서 다시 마주치게 될지라도, 부디 행복한 시지프의 표정을 당신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시지프여, 안녕!
*
그 해 가을, 나는 형의 중매로 결혼을 했다. 형이 근무하는 은행의 여직원이었는데, 형의 말처럼 여자로서는 별달리 나무랄 데가 없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아이 낳고 살다 보면 세상 여자가 다 그렇고 그렇게 느껴진다던 형의 주관을 수긍해서 결혼을 결심한 건 물론 아니었다. 아이 낳고 살아 보지 않아도 세상 만사가 다 그렇고 그렇게 느껴지던 무렵이었으니 결혼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도 별로 없었다. 어쩌면, 옥탑방의 추억이 그렇게 커다란 공동으로 가슴에 남겨지리라는 걸 미처 예견하지 못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리라. 아니면 그녀보다 강렬한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상대를 세상에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고 모든 걸 단념해 버린 탓.
그 해 가을, 나는 대기업 홍보실로 직장을 옮겼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평생 밥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 특별할 것도 없는 나날을 무감각하게 살아가기 시작했다. 관성으로 살아가고, 관성으로 나이가 들고, 관성으로 세상을 견디는 가련한 시지프의 초상.
지난 십 년 동안 나는 시지프들의 세계에 안주하고 있었다. 몽타주로 재현되는 무수한 시지프들의 세계, 산정을 향해 바위를 밀어 올리는 불굴의 의지를 상실해 버린 시지프들의 세계, 희망 없는 노동을 죄악시하고 도로(徒勞)를 무능의 결과로 치부해 버리는 시지프들의 세계, 신을 향한 멸시를 두려워하고 운명을 극복하려는 반항적인 분투를 상실해 버린 시지프들의 세계ㅡ그곳에 안주하며 하루하루 종말적인 인간의 시간을 살아온 것이었다.
아주 가끔, 신화 속의 시지프가 기억에서 되살아날 때가 있었다. 늦은 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다가 문득 형네 집에 얹혀 살던 시절을 떠올리게 될 때, 새벽에 뜻하잖게 잠에서 깨어나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될 때ㅡ그럴 때마다 찡그린 얼굴, 바위에 부벼대는 뺨, 진흙에 덮인 돌덩이를 멈추려고 버틴 다리, 바위를 받아 안는 팔, 흙투성이의 손 같은 게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한 것이었다.
ㅡ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멸시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지프가 깊이 잠든 오관을 후려칠 때마다 쩡, 쩡, 어디선가 빙벽을 깨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전으로 밀려들곤 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나는 낯선 지상에 서 있었고, 손가락을 헤어려 보면 나도 모를 나이가 되어 있었다. 옥탑방으로부터 현재까지의 거리, 그리고 옥탑방을 떠나던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세월.
십 년 세월이 지난 지금,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남겨진 시간에 대해 깊은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지나간 시간보다 남겨진 시간이 두려운 건 변화가 아니라 불변하는 것에 대해 느끼는 끈끈한 채무감 때문이리라. 주어진 형벌의 바위를 부정하고, 지상에 안주하기 위해 인간의 숙명까지 부정하는 시지프들의 지옥ㅡ무슨 이유 때문인가, 추억이 망각의 늪으로 잦아들 때가 되었는데도 내 마음의 옥탑방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곳에서 살았던 한 여자의 존재감 때문이 아니라 옥탑방이라는 상징, 그것이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불완전한 지상의 주민, 숙명의 전모를 간파하지 못하는 인생의 장님들에게 그 빛은 무엇을 일깨우고 싶어하는 것일까.
ㅡ아주 우연히 지상에서 다시 마주치게 될지라도, 부디 행복한 시지프의 표정을 당신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의 편지,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력을 느끼게 하는 주시(注視)의 언어로 나의 기억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언젠가, 우연을 가장하고 찾아올지도 모를 필연의 시간에 나는 어떤 시지프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치게 될지라도, 편견과 모순과 아집에 사로잡힌 불행한 시지프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 운명에 당당하게 맞설 줄 아는 행복한 시지프의 얼굴을 나는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다. 내가 그녀를 알아보거나 그녀가 나를 알아보는 순간, 혹은 내가 당신을 알아보거나 당신이 나를 알아보는 순간을 상상해 보라. 그러면 옥탑방에서 밀려 나오는 불빛의 의미, 준비된 자세로 항상 깨어 있으라는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라는 걸 알 수 있으리라.
지금, 당신의 옥탑방에 불을 밝혀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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