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해당 부분
제 1장 모방으로서의 시와 모방 수단
제2장 모방 대상
제3장 모방 방식
예술을 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서로 다른 시각
오늘의 주제인 “미메시스”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플라톤의 유명한 “이데아론”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플라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초월한 저 멀리 어느 알수 없는 곳에 “이데아의 세계”란 것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계에는 세상 만물 각각의 “이데아”란 것이 살고 있는데 이데아는 유일하고, 절대적이고, 보편적이고 영원 불멸하는 단 하나의 어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길고양이들이 많이 있고 각각의 고양이들은 늙어 죽고 없어지지만, 이 고양이들의 “원본”인 단 하나의 “고양이 이데아”가 이데아의 세계에서 영원토록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이데아란 놈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가 손으로 만질수도 없고 눈으로 볼수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형이상학적인” 존재인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이 이데아가 세상 만물의 “본질”, 다시 말해 오리지널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데아와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니, 만지지도 못하는걸 어떻게 만나라는 소리일까요?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이성적”으로 열심히 자기수양을 하고 도를 닦으면 결국엔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꿈같은 소리가 진짜일까요? 물론 저는 이런 잠꼬대를 믿지 않지만, 정말 놀랍게도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수천년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온갖 철학과 예술, 문학 등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기서 이전 오리엔테이션 편에서 제가 말했던 “현대의 거의 모든 생각의 기원이 고대 그리스 문명에 있다”라는 소리를 다시 상기합시다). 그래서 철학자 화이트 헤드는 “서양철학의 역사는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는 말도 했지요 [1]. 이는 플라톤을 그 시작으로 후배 철학자들은 그저 플라톤의 이론에 한마디씩 더한것에 불과하다는 소리입니다.
다음은 영화 평론가 유운성씨의 영화(시네마)에 대한 묘사입니다 [2].
시네마는 고유한 본질을 지니지 않는 변증법적 사물이기 때문에 그것의 정체를 묻는다는 일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 중략… 우리는 영화란 무엇인가? 라고 묻기 보다는 어떻게 영화하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시네마는 명사적 실체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동사적 수행을 통해 발생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 중략.. 시네마 또한 이러한 것/사물의 일종이라면 그것은 필시 능수능란하게 분신술과 변신술을 펼치는 유령에 가까울터이다.
유운성씨의 영화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형이상학적”인데, 이 또한 궁극적으로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유운성씨의 말에 따르면 아마도 “시네마의 이데아”가 저기 어딘가의 환상적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고 그것의 복사본인 영화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것인데, 이 영화는 마치 “유령”과도 같이 변신을 한다고 합니다. 이 변신 부분도 역시 대단히 플라톤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헤겔의 변증법에서 모티브를 받은 듯 합니다 [3].
이런 형이상학적인 이론들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비판될수 있는데, 가장 단순하게 생각해봅시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유운성의 시네마나 모두 유령과 같아서 손으로 만질수도, 눈으로 볼수도 없습니다 (비록 플라톤은 열심히 도를 닦으면 이데아와 만날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집 장롱속에 금송아지 100마리가 있는데 그것을 만질수도 볼수도 없다면 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사실상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무의미(meaningless)”한 명제들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현대의 영미 철학계(주로 분석철학자들)에서는 위와 같은 플라톤의 후예들이 하는 소리들은 모두 “헛소리” 내지는 “잠꼬대”로 취급합니다. 여담으로 영화학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이 가져오는 문제들과 관련하여서는 제 저서인 <영화에 관하여, 제임스 진 저>에 좀더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 작성 당시에는 아직 미출간 상태임) [4].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이어가 봅시다.
먼저 여기 이데아의 세계에 “미인의 이데아”가 있습니다.
[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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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데아가 “미메시스”되어 현실세계의 “카리나”로 강림하게 됩니다. 미메시스에 대해서는 아래 절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할테니 여기서는 그냥 단순히 “복사(copy)” 정도의 의미라 생각하시고 넘어갑시다.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면 이 현실세계의 카리나는 “복사본”에 불과합니다. 즉, 순수한 본질이 아니고 “가짜 허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플라톤은 저런 여우같은 기집애에 속지 말고 이성을 갈고 닦아 본질인 이데아와 만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카리나에 속아 넘어가게 되고 다음과 같은 3행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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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나
리나
나와 결혼해주겠니?
제가 쓴 3행시는 문학 작품으로서 예술입니다. 제 창작의도는 현실세계속의 “미녀 카리나”에 대한 저의 마음을 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카리나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옮기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실세계의 카리나를 “미메시스”한 것이지요.
저의 이같은 예술행위에 대해 플라톤이 본다면 노발대발 하실겁니다. 사물에 대한 본질인 이데아를 추구해야 할것인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본질의 복사본에 불과한 카리나를 또다시 복사하여 3행시나 쓰고 앉아있는 한심한 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플라톤은 문학을 비롯하여 예술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봅니다.
반면 우리가 보는 시학의 저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에 대해 꽤나 호의적입니다 (당연히 호의적이니까 시학책을 썼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카타르시스”라는 기능에 주목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책의 다른부분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간단히만 이야기하자면…
제가 쓴 3행시는 사실 비극입니다.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같은 비극이 독자나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고 결국에는 “감정이 정화”되는 일종의 심리 치료적 효과가 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렇게 예술도 나름 유익한 것이니 카리나에 홀려 복사본을 만들었다고 뭐라하지 말고 좀더 좋은 복사본을 만들수 있게 격려하고 잘 가르치자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책 <시학>이 탄생된것이지요:)
미메시스란 무엇인가?
우리가 보는 저본의 역자인 박문재는 미메시스를 “모방(imitation)”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번역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왠지 “모방”이라는 단어의 늬앙스가 짝퉁을 만드는 부정적인 행위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역자가 좋지 못한 번역어라고 주장한 “표현”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는 미메시스를 그냥 번역하지 말고 “미메시스”라는 고유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보며, 이 미메시스라는 용어를 볼때마다 위에서 제가 말한 카리나 스토리를 떠올리면서 대강 “무언가가 복제되어 재현되는 것인데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고 중립적인 의미인 것” 정도로 받아들이시면 될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술을 위해 이 미메시스를 행하는 방법에는 정말로 다양한 방법들이 있는데, 시학에서 소개하고 있는 운문, 산문, 음악, 음성, 연기등은 물론이고, 현대의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미장센이나 몽타주(영화 편집)와 같은 기법들도 말하자면 모두 미메시스의 수단이라고 볼수 있겠습니다.
참고문헌
[1] 화이트헤드의 수학이란 무엇인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저, 오채환 역
[2]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 유운성 저
[3] 서양철학사 (상), 버트런드 러셀 저, 최민홍 역
[4] 영화에 관하여, 제임스 진 저 (본 글 작성 당시에 미출간 상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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