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현대적 해설 | 3.플롯에 관하여 – 1

책의 해당 부분

제6장 ~ 제11장 까지

플롯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에서 “플롯”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특별한 소리는 아닌데, 우리도 영화평론가들이 “이 영화는 플롯이 탄탄하다” 하는 식으로 어떤 영화를 칭찬하는 말들을 흔하게 들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플롯이란것이 대체 뭘까요?

이야기(스토리), 서사(네러티브), 플롯, 이렇게 몇가지 개념들이 우리를 혼란 스럽게 합니다. 이런 개념들을 “굳이” 구분지어 정의한다면 정의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분류들이 실질적으로는 무의미하다고 보는데 창작자에게나 독자에게나 별 실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들의 구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안합니다.

일단 위 모든 개념들이 전부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즉, 스토리나 서사나 플롯이나 대충 “이야기”를 지칭하는 용어인것입니다. 따라서 “서사 구조가 특이하다”라는 말이나, “스토리 구조가 특이하다”라는 말이나, “플롯 구조가 특이하다”라는 말이나 모두 거기서 거기, 다 똑같은 말입니다. 즉, 취향대로 아무 용어나 써도 됩니다.

다만, “유달리” 이야기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긴밀함” 또는 “필연성” 또는 “인과관계”등을 강조를 해서 말하고 싶다면 “플롯”이란 용어를 쓰시기 바랍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계속 플롯 플롯 그러는것도 그가 사건간의 필연성을 중시여기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 작품이 마치 건축물처럼 튼튼한 구조물처럼 만들어지고 사건간의 흐름이 마치 톱니바퀴가 굴러가듯 한치 오차 없이 정밀하고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야 모범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그의 문학관은 사실 “고대 그리스 정신” 그 자체이기도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이성과 균형을 중시여겼는데 그리스 신전과 같은 건축물들에서 보여지는 지붕과 기둥들의 수학적으로 계산된 비율들, 그리스 조각상들에서 보여지는 신체의 균형잡힌 비율들, 이런 것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이성과 균형을 좋아했는지 쉽게 알수 있습니다.

따라서 플롯은 기승전결이 뚜렷하여 적당히 독자들과 “밀당”을 해줄수 있어야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특별히 “반전”이라는 요소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식스센스>에서처럼 마음씨 좋은 정신과 의사인줄알았는데 알고 보니 죽은 귀신이라던지(“무지”에서 “지”로의 반전), 로또 당첨되서 즐거운 마음으로 크루즈 여행을 떠났는데 배안에 명탐정 코난이랑 김전일이 있다던지(“행운”에서 “불행”으로의 반전)하는 플롯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가 칭찬할 만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플롯은 어떠한 불필요한 사건들도 없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모양새를 띄고 있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현대에는 “체호프의 총”이라는 원칙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가 말한 것인데, “극중에서 총을 보여줬으면 반드시 그 총은 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등장인물이 총을 보여주며 얼마인지 어디서 샀는지 열심히 설명해놓고서 엔딩까지 두번다시 그 총이 나오지도 않는다면 앞서의 설명장면은 쓸데없이 관객들의 시간만 낭비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플롯 구조는 우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가지 의문이 드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범적 플롯”이 너무 모범적이라 식상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화에서도 홍상수 감독등과 같이 기승전결이 흐리멍텅하거나 심지어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이 된 “해체된 플롯”의 형태를 띄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만약 이러한 작품들을 본다면 엉터리 작품이라 노하실텐데, 이런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 이론이 다소 “구닥다리”로 보이는 것은 그의 이론이 후지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매우 탁월하다는 방증으로 보아야 합니다. 너무 뛰어나서 수천년동안 대부분의 문학가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문학들이 “아리스토텔레스화”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이른바 “반-아리스토텔레스”식 플롯도 어느정도 의미가 있다고 말할수 있겠는데 특히 극이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을때 이같은 반항이 의미가 클것 같습니다. 위에서 말한 홍상수 감독은 “리얼함”을 중요시 하는 작가입니다. 우리 현실세계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식 플롯처럼 체계적이고 논리적이지는 않습니다. 오늘 기분좋았는데 내일 당장 차에 치여 죽는 일도 종종 일어납니다. 매일 매일이 비슷비슷하고 벌어지는 사건이 딱히 드라마틱하지는 않습니다. 이같은 리얼한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예외적”으로 “반-아리스토텔레스식 플롯”이 더 유리할수도 있는 것입니다.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란 용어의 창시자인데, 문학의 “카타르시스 효과”를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그런데 이 “카타르시스”란 용어가 대중들에게 크게 잘못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이점을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카타르시스는 “비극을 감상함으로써 얻어지는 긍정적인 심리효과”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비극” 즉, 슬픔이라는 부정적인 것을 통해 긍정적인 것을 얻는 역설적인 작용을 말하는 것이지요. 시중에서는 어떤 나쁜놈이 길가다 넘어져서 코가 깨지면 그것을 본 사람들이 깔깔대고 웃으면서 속이 시원하다 사이다 먹은 것 같다며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고 표현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은 “카타르시스”와 관계가 없는 상황입니다. “깔깔 대고 웃으면서 기분 좋은 상황”은 비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슬픈 상황에만 쓸수 있는 용어가 바로 카타르시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비극을 보고서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일까요? 왠지 이같은 일은 사이코패스들이나 가능할것만 같은데 그렇지 않고 우리 모두 언젠가 경험을 해본 일입니다.우리는 슬픈일이 있어서 펑펑 울고 나면 마음이 왠지 시원해지는 느낌을 얻곤 합니다. 이 느낌이 바로 카타르시스입니다. 다만 여기서의 슬픈일은 실제 현실의 일로서 가상의 비극과는 다르다는 점만 차이가 있을뿐입니다.

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어떤 매카니즘으로 일어나는지와 관련하여 학자들간의 논란이 있습니다. “감정의 정화”효과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감정의 배설”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자의 주장은 “정화”가 도대체 어떻게 정화된다는 소리인지 의문스럽게 들립니다. 배설이라는 주장이 약간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네요. 비극을 감상하고 펑펑 울면 마음속의 암울했던 감정들이 쏟아져 나와 배설되어 평온해진다는 발상인거죠.

마지막으로 이런 문제도 제기될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나 좋은 비극을 매일매일 보고 카타르시스 효과를 얻는다면 멘탈이 엄청 튼튼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과연 이 생각이 옳을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데, 애당초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요즘과 같이 매일 비극을 감상할수 있는 넷플릭스같은것이 없었습니다. 매년 한두번 열리는 축제같은 곳에서 감상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러한 문화환경을 고려하여 카타르시스론을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적당히 어쩌다 한번씩 비극을 봐야지 심리적으로 좋은 것이지 매일 비극에 쩔어살면 도리어 정신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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