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창작자가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짧은 가이드

들어가며

대중적인 상업 영화의 경우는 굳이 필요없겠지만, 예술적 목적이 큰 영화들을 — 특히 인간의 삶을 그린다거나 사회의 문제를 비평한다거나 하는 작품 — 만들기 위해서는 고도로 깊은 사고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 철학과 문학에 대한 학습이 거의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조사한 바에(2023년 기준) 의하면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제외하고는 주요 대학의 영화학 학부과정에 철학수업이 개설된 곳은 전무했습니다. 따라서 철학과 문학 학습이 필요한 영화 창작자는 스스로 독학으로 공부할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본 글은 이같은 독학자를 위한 간단한 가이드 목적으로 쓰여진것인데, 제가 운영하는 유튜브 구독자 한분이 위와 같은 고민을 하는것을 보았고 이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관련된 제 의견을 간단히 정리한 것입니다.

철학을 학습하는 첫번째 방법

철학은 크게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으로 나뉘는데 현실적으로 서양철학을 우선 학습하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주요 철학자들의 이론들을 철학사 책을 통해 “대략적”으로 살핀후 그중에서 자신이 가장 마음에 끌리는 철학자를 골라 그 철학자가 직접 저술한 원전을 읽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첫번째 방법입니다.

이 작업을 위한 서양철학사 책으로, 저는 램프레히트가 쓴 서양철학사(을유 문화사)를 추천합니다. 책이 비교적 얇고 저렴하며 압축해서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실 철학에 대해 전혀 모르는 초심자가 읽기에는 상당히 어려울수 있으나, 그나마 이 책이 철학사 책 중에서는 쉬운편에 속하며 무엇보다 이 책의 수준을 이해하지 못하면 애당초 의미있는 철학 학습은 힘들다고 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 책을 독해하기가 너무 부담스럽다고 느껴진다면 과감하게 철학 학습은 포기하고 아래에서 설명할 문학 학습으로 신속하게 대체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철학을 학습하는 두번째 방법

위와 같이 철학자 위주로 학습하는 방법 말고 주제별로 학습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자신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느끼고 있는 중요한 고민거리를 먼저 상정합니다. 여기서 방금전 제 말을 듣고 “내 고민거리가 뭐지?”하고 곰곰히 찾고 있다면 여러분은 여기서 말하는 “중요한 고민거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억지로 고민거리를 끼워다 맞추어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영화창작을 위한 철학 학습이라는 본 작업을 위해서는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는 인생에 있어서는 축복인데, 영화창작을 위해서는 저주가 됩니다).

만약 단박에 고민거리가 머릿속에서 자신있게 튀어나왔다면 그 고민거리를 논했던 철학자를 조사해서 찾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쓴 책을 읽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불안장애로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불안에 대해서 논했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의 저서를 읽는 식입니다. 본 방법에 따르게되면 자신의 고민거리가 해소되므로 아무리 어려운 철학서도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생생하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당연한것이 본인 이야기를 책에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창작하는 영화 자체에 본인의 고민거리를 연결짓는다면 영화 창작 작업 자체가 일종의 “자가 심리 치료 과정”이 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완전히 차별적인 깊이를 갖게 되는데 실례를 들자면 홍상수 감독의 전 작품들, 우디 앨런 감독의 일부 작품들은 이런식의 과정으로 만들어진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창작자를 위한 추천 철학자들

원론적으로 위 두 방법중 하나를 따르는것이 좋겠지만 참고를 위해 영화 창작자에게 적합하다 생각이 드는 철학자 몇 분과 관련된 서적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들 입니다. 실존주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대단히 주체적이라 예술가들이 좋아할만하고 실제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수 책들이 논문 형태이외에 소설과 희곡으로도 쓰여져 있어서 친숙하게 접근할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가 있고, 관련 서적으로 다음을 추천합니다. 위로 갈수록 쉬운 책입니다.

1.실존주의자로 사는 법, 게리 콕스 저

2.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최성호 저

3.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저

 

다음으로 철학자 니체를 추천합니다. 니체도 실존주의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니체의 위상은 매우 높으므로 이렇게 묶으면 안되고 별도의 개별적인 철학으로 간주해야 할것 같습니다. 니체 역시 대단히 주체적이고 기존의 상식을 깨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여 예술가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철학자 입니다. 아울러 니체는 아포리즘 형태의 짧은 격언들을 묶는 형식으로 책을 많이 써서 일단 해독이 쉽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책으로 시작하는 것을 추천하며, 이 책이 너무 두껍다는 생각이 든다면 서점에 가서 니체가 쓴 책들을 쭉 살펴보아 위 책과 같이 아포리즘 격언형식으로 쓰여진 책중에서 아무것이나 하나 적당한것을 골라 시작해도 됩니다. 단, 니체는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많은 철학자라 니체의 말들을 짜깁기하여 자기개발서 형태로 시중에 많이 출간되어 있는데, 절대로 이러한 책은 읽으면 안되고 니체 본인이 쓴 책을 읽어야 합니다.

글을 쉽게 쓰는 철학자는 없을까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글의 내용과 형식이 엄격하고 까다로운 경우가 많아 접근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글을 쉽게 쓰는 철학자를 찾을수도 있을텐데, 일단 “글 자체”가 쉬운 철학자도 많지는 않지만 있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글의 해독과 철학자에 대한 이해는 별개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층적입니다. 즉, 이해라고 해서 이해했냐 아니냐 이렇게 이진적인것이 아니고, 단계별로 다양한 수준에서 이해를 논할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철학에 있어서 궁극적인 이해는 “철학자 본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철학서들이 어려운 이유는 철학자 본인의 머리가 어려운 생각들로 꽉차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가 자신의 어려운 생각을 언어로 전환하여 책을 쓸때 일단 상당수 생각들이 댕강댕강 잘려나가게 됩니다. 언어로 생각을 모두 표현하는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철학자 본인이 책을 쉽게 쓰려고 의도하면 어쩔수 없이 자신의 생각에 가지치기를 해서 잘라내야 합니다. 쉬운 말로는 표현이 안되는 생각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쉽게 써진 철학서의 경우 글 자체는 쉬운데 사실은 더 어려운 경우가 되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실례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쓴 “행복의 정복”이란 책은 일반 대중 교화를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라 글 자체는 매우 쉽고 시시하다는 생각까지 들정도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진짜로 이해하는데 12년이 걸렸습니다. 이처럼 글자 자체를 해독하는 일과 철학자 본인을 이해하는 일은 다른 작업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굳이 “글을 쉽게 쓰는 철학자”를 별도로 찾을 필요는 없어보이고 어려우면 다른 대학 교수가 해당 철학자를 쉽게 풀이해서 쓴 입문서를 읽던지 아니면 어려운 책은 그냥 포기하고 다른 책을 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문학을 학습하는 방법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문학도 아주 유용합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철학보다 그 효과가 떨어진다고 보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때 지적인 면에서 더 뛰어난 사람들이 문학가 보다는 철학자를 직업으로 택했기 때문에 발생되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 말을 혹시 문학을 하시는 분이나 문학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분들이 본다면 불쾌해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것이고, 저는 역사적 진실을 말해야  하는 입장이니 노여워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철학보다 떨어진다는 소리이지, 문학에도 분명히 소중한 지혜들이 무척이나 많이 있는것은 사실이고 무엇보다 문학은 형식적인 면에서 보다 쉽고 재미있게 접할수 있어서 사람에 따라 학습효과가 오히려 좋을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창작에 있어서 각본 작업에 크게 도움이 될 여지도 있고 문학을 모티브로 직접 영화를 만들수 있다는 장점도 갖습니다.

문학 학습은 검증된 고전을 위주로 자신의 흥미에 따라 읽어나가거나 아니면 위에서 설명한 철학학습의 두번째 방법을 준용하여 학습할수 있겠습니다.

영화 창작자를 위한 추천 문학가들

영화 창작자를 위해 특별히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문학서들을 몇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1.셰익스피어 희곡들 : 희곡의 전형이기에 읽을 가치가 있고, 수많은 영화들의 원전입니다.

2.안톤 체호프 희곡들 : 위와 같은 이유에서 추천합니다.

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프루스트의 이 책은 인간 심리를 아주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누구나 이 책에서 자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고과정을 발견할수 있을정도로 치밀합니다. 한가지 단점이 양이 너무 방대하고 사실 대단히 지루하다는 점인데, 지루함만 참을수 있다면 읽어볼만 합니다.

4.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 : 이 두 사람은 소설가 중에서 드물게도 철학자로도 분류되는 분들인데, 그만큼 심도 깊은 작품들을 써냈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5.알베르 카뮈의 소설들 : 이분도 소설가이면서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로도 분류되는 분인데 위와 같은 장점을 동일하게 갖습니다.

6.그리스인 조르바 :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인데, 정열적인 삶에 대해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7.지상의 양식 : 앙드레 지드의 에세이인데, 이 역시 정열적인 삶에 대해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책은 홍상수 감독이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기타 참고자료

아래 링크는 제가 쓰고 있는 영화 창작자에 특화된 철학 관련 연재글입니다.

영화 창작자를 위한 철학 연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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