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창작자를 위한 철학 1 | 일반인에서 영화창작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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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대상 독자

이 글은 말 그대로 “영화 창작자”를 대상으로 하는 “철학” 강좌 글입니다. 저는 여기서 영화 창작자로서 주로 “영화 감독”과 “각본가”를 상상하고 글을 쓸것이지만 그 밖에 배우, 기타 스탭들도 읽어서 나쁠것은 딱히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이란 부분에 대해 설명하자면, 엄밀히 말해서 이 글의 내용이 학문적인 진짜 강단 철학을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애당초 그런 심오한 글을 쓸 능력은 제게 없습니다. 여기서의 철학은 진짜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넓은 의미에서의 “생각, 사고방식” 이정도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연재글 말미에 진짜 철학에 대한 내용도 아주 짧게 언급할 계획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편의상 좀더 구체적인 가상의 대상 독자를 설정하는게 좋겠군요.

 

“안녕? 난 김고은이라고 해.”

 

이 분이 우리 연재 글 시리즈를 읽을 것이라고 설정된 가상의 독자입니다. 이름은 김고은(배우 김고은하고는 다른 사람, 동명이인입니다), 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며, 취미가 야구라서 공부는 안하고 맨날 야구만 하고 돌아댕기는 지극히 평범한 여대생입니다. 아니 당신 눈알이 어떻게 된 것이냐? 저 얼굴이 어떻게 평범하단 말이냐? 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는데, 제가 여기서 평범하다고 말한것은 얼굴이 아니고 머리, 즉 평범한 지성을 가진 보통의 대학생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가상의 김고은 양이 읽는다고 예상하며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은 김고은1, 김고은2, 김고은3… 이 되는 것이죠.😆 허구많은 사람들중에 굳이 김고은인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제 취향에 따라 정했습니다.  아무튼, 여러분이 예상 독자인 김고은 양과 차이가 크면 클수록 이 글이 쓸모가 없게 느껴질수도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영화감독을 꿈꾸는 중학생이나 하버드 철학과 명예교수님들은 이 연재글이 딱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안타깝게도 우리의 김고은 양은 아직 영화의 영짜도 모르는 상태로 야구 동아리에 가입해서 저렇게 맨날 야구만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이 야구선수를 위한 철학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먼저 김고은 양을 땀냄새나는 야구동아리에서 탈퇴시키고 영화 동아리에 가입시켜 “영화창작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따라서 평범한 일반인을 “아마추어 영화창작자”로 전환시키는 부분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선천적 매트릭스 속의 우리들

한국인들에게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구한 위대한 영웅”입니다. 반면 일본인에게 이분은 “동족을 학살한 악당”일 것입니다. 여기서 한국인과 일본인은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정반대의 차이를 보입니다. 둘중 누가 맞는 것일까요? 여러분 중에 한국어를 네이티브수준으로 잘해서 이 글을 읽고 있는 일본인은 거의 없을것 같습니다. 아마도 대부분 한국인일 여러분들 역시, 이순신 장군을 “나라를 구한 위대한 영웅”으로 생각하고 일본인들이 당연히 틀렸다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여기서 프랑스인이 갑자기 들어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왜 이순신이 영웅이냐? 고 묻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나름의 논리적 설명을 덧붙일수도 있을겁니다. “일본이 먼저 쳐들어왔고, 국가를 위해 정당방위 차원에서 침략자를 죽인 것이니 이순신 장군이 영웅인겁니다” 이런식으로 말이죠.

이순신 장군만큼이나 한국인들에 영웅인 또 한분이 계십니다. 바로 광개토대왕이지요. 한국인들에게 광개토대왕은 “대륙 진출에 앞장선 위대한 영웅”입니다. 그런데 만주에 사는 중국 유목민 후손들 입장에서 광개토대왕은 “잔인한 침략자 악당”에 불과할 것입니다.

여기서 아까 그 프랑스인이 똑같이 왜 광개토대왕이 영웅이냐? 침략자 악당 아니냐? 고 묻는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사실 우리는 할말이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 케이스와 정확히 반대이기 때문이죠. 이순신 장군에서의 논리대로라면 정말로 광개토대왕은 침략자 악당이 되버립니다. 만약 광개토대왕님을 살리고 싶으면 거꾸로 이순신 장군을 학살자 악당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어느쪽을 택하든 대부분의 한국인이라면 겉으로 말은 어떻게 할지 몰라도 속으로는 상당한 “거부감”이 들기 마련입니다. 저 역시도 지금 글을 쓰면서 슬쩍 슬쩍 거부감이 듭니다. 이같은 거부감은 우리의 판단을 심각하게 흐트려놓게 되는데, 위 글에서 제가 굵은 볼드체로 처리한 부분 즉, “한국인, 이순신 장군, 일본인, 국가, 정당방위, 죽인것(살인), 광개토대왕, 중국”이란 개념과 관련하여 여러분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어렸을때부터 알게 모르게 입력받았던 교육 덕분에 생겨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생각, 중국 유목민들의 광개토대왕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완전히 정반대인 이유도 이같은 교육 덕분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교육은 학교교육은 물론이고 밥상머리 교육, 대중매체를 통한 영향, 친구들 사이의 영향 기타 등등 모두 포함입니다).

미국인들은 기독교의 신을 믿고, 인도인들은 힌두교의 신을 믿고, 이란인들은 이슬람교의 신을 믿습니다. 이 중 최소한 두 국가의 사람들은 완전히 틀린 생각을 품고 산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동시에 두종류의 신이 참일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셋다 틀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은 불교가 진리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 국가의 사람들은 한치의 의심없이 당연한듯이 각자의 신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이 모든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리냐?” 가 아니고, “이같은 신념은 어떻게 생겨났는가?”입니다. 다시말해 여러분이 현재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입니다. 사고방식을 구성하는 중요한 하나의 요소로 “도덕” 혹은 “윤리관”을 뽑을수 있겠는데,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도덕률은 본인이 태어난 환경에 다름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한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프랑스에 살고 있는데 옆집 여자(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가 들켰다고 가정합시다. 프랑스인인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로 부터 딱히 바람직하지는 않은 일을 저질렀지만 그렇다고 천벌받을 놈 취급을 받지는 않고 그럭저럭 일상생활을 할 것입니다. 반면 여러분이 이란인으로 태어나 이란에서 살고 있는데 위와 동일한 일을 저질렀다면 여러분은 재판도 없이 주위 사람들로 부터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여러분이 중세시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지구가 뱅글뱅글 돈다”라고 한마디 하면 여러분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윤리”자체를 심각하게 침해한 부도덕한 사람 취급을 받고 불에 활활타 죽게 될것입니다. 그 시절의 윤리는 기독교 윤리관을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미국인 여성으로 태어나 현대의 캘리포니아 거리를 비키니 차림으로 쏘다녀도 별문제가 없지만, 같은 옷차림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다녔다가는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해야 합니다. 현재의 우리들은 돼지 삼겹살을 맛있게 먹고 있지만 200년후 우리의 후손들은 어떻게 그 귀여운 돼지들을 먹을수 있느냐며 우리를 보고 야만의 족속들이라고 비하할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사고방식”은 우리가 최초로 태어난 장소와 시기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이 장소와 시기는 완벽하게 “랜덤”으로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여러분 머릿속의 생각과 사고방식은 조금 비약하자면 랜덤 가챠 슬롯머신으로 최초로 우연히 생성되서 발전되어 나갔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물론 운이 억세게 좋아 랜덤으로 건강하고 옳은 생각들만 우연히 만날수도 있겠지만 정반대로 이상하고 틀린 생각이 자리잡았을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한번쯤은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해 의심을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옳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꽉찰 만큼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수학자 가우스는 통계학상의 “정규분포”라는 개념을 주장하였는데, 이 개념을 본 문제에 아주 간단히 적용하자면 위와 같이 무작위 랜덤상황에서 한 사람의 머릿속은 “대강 얼추 괜찮은 사고방식”들이 대부분을 차지 하긴 하지만 머릿속 일부는 “좀 이상하고 틀린 사고방식”들이 자리잡게 되고, 나머지 극히 일부는 “심각하게 또라이 같은 오류”들이 자리잡게 됩니다. 사실 이런 경우가 더 무서운건데, 아얘 100% 전부 틀린 사고방식만 있으면 문제가 있다고 확실하게 드러나겠지만 이런식으로 참과 거짓이 복잡하게 섞여 있으면 도대체가 분별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결국에 우리 모두는 일종의 “선천적 매트릭스 세계”속에서 살고 있다고 볼수 있겠는데,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자각”을 하기 전까지 자신이 매트릭스 세계에서 살고 있는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듯이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쨌든 대부분의 일상생활에서 큰 문제는 없이 살아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사고방식의 문제는 주로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결정적인 위기상황 또는 난관이 따를때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것이 사고방식의 문제인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게 됩니다. 그 사고방식에 너무나도 익숙해졌기 때문이죠.

선천적 매트릭스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저만 알고 있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이미 여러 “위대한”사람들은 위와 같은 문제들을 스스로 자각을 하고 이같은 선천적 매트릭스 세계에서 탈출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궁극적으로 위대한 과학자, 철학자, 예술가들이 했던 작업들은 모두 이 선천적 매트릭스 세계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던 그들 나름의 노력들입니다.

물론 예술로서의 영화를 통해서도 이같은 탈출 작업을 시도할수 있습니다. 다음편에서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것인지 그 방법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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