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창작자를 위한 철학 2 | 버트런드 러셀과 좋은 삶 상편

지난 이야기

영화 창작자를 위한 철학 1 | 일반인에서 영화 창작자로

 

 

윙크하는 김고은 양

 

지난 시간에는 가상의 주인공 일반인 김고은 양을 영화 창작자가 되라고 꼬드기는 작업을 시작하였고, 이를 위해 “선천적 매트릭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이 선천적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오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그런데 잠깐 당부드릴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이 “선천적 매트릭스”란 말은 물론 제가 본 연재글을 위해 만든 말입니다. 조금 유치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영화 창작자”를 위한 글이므로 이에 어울리게 실제로 널리 알려진 영화 <매트릭스>를 은유하면 더 실감이 날 것 같아 이렇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 한가지가 저는 이 말을 어떤 신비롭고 절대적이고 상식밖에 있는 경지같은 것을 가르키려고 쓰는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저의 쓰임새와는 정반대로 이런류의 장벽을 신비롭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종교적 진리나, 불교 철학에서의 깨달음 혹은 해탈, 노자의 도, 계룡산 도사님들이 말하는 도 같은 것들이 이러한 소산입니다. 아무튼 이들과는 반대로 저는 이 말을 지극히 상식적이고 소박한 의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일단 밝혀두겠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이 말하는 좋은 삶

좋은 삶이란, 사랑에 고무되고 지성에 인도되는 삶이다.
-버트런드 러셀

버트런드 러셀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의 철학자입니다. 이 분은 좋은 삶에 대해 위와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1]. 저는 이 명언을 읽은 여러분 대다수의 반응이 다음과 같으리라 예상을 합니다.

 

“음.. 좋은 말이네. (심드렁).”

 

이런식으로 대강 좋은 말로 들리기는 하지만 별 감동은 없을겁니다. 읽고 나서 그냥 심드렁하고 시큰둥한게 정상적인 대다수의 반응입니다. 사실 비단 이 명언 뿐만아니라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하는 명언을 읽고나면 대충 좋은 말 같지만 그렇다고 딱히 큰 감동은 없습니다. 이제 부터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살펴봅시다.

명언의 제조 과정

유명인사들의 명언이 발언자가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서는 “지금부터 내가 명언 한마디를 하겠소. 잘들 받아 적으시오” 하고서 한마디 해서 만들어 퍼지는게 물론 아닙니다. 우선 유명인사들이 책이나 인터뷰에서 길고 지루한 말들을 하고나면, 나중에 명언 제조업자(?)들이 그 길고 지루한 말들중에서 한마디를 쏙 뽑아서 발췌합니다. 그리고 나서 명언을 모은 명언집을 출판하거나 최근에는 짧은 숏츠 영상이나 인스타 짤 이미지로 만듭니다. 따라서 “명언의 구조”는 정확히 아래 그림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 그림에서 수면위로 뽈록 나온 부분이 바로 여러분이 위에서 보았던 러셀의 “명언”입니다. 그리고 아래 수면 깊이 거대하게 명언의 발언자인 러셀의 “사상” 혹은 “철학”이 존재합니다. 러셀 철학이 중고등학교 정규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여러분은 현재 수면 아래 거대한 부분은 전혀 모른채로 수면 밖의 작은 부분인 명언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동은 커녕 그냥 시큰둥한 느낌밖에 받을수가 없는것이죠.

심지어 저는 러셀의 위 명언을 여러분 대부분이 현재 오해하고 있다고 예측합니다. 위 명언에는 어려운 용어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단어가 초중등학교 수준의 단어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면 아래 빙산을 모른채로 보면 문장의 뜻을 달리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오해를 했는지는 다음편에서 확인해볼것이고, 이번 편에서는 말이 나온김에 이와 관련된 “통속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하겠습니다.

통속 인문학의 문제들

저는 “통속 인문학”이라 부르고 싶은데 대게는 “대중 인문학”이란 말로 더 많이 불리우는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십여년전부터 유행했던것 같은데, 대중 일반을 대상으로 인문학을 약간 말랑말랑하게 가공하여 “살짝만” 어렵게 난이도 조정을 한 인문학이 유행처럼 유통되고 있습니다.

책으로도 많이 나오고, 최근에는 오뚜기 짜장덮밥 마냥 “3분만에 보는 철학” 이런식으로 유튜브 채널도 있더군요. 다루는 사상가도 유행을 타는데, 제가 기억하는것만해도 오래전에는 노자가 유행이었고, 그 다음에는 심리학자 아들러, 니체도 유행했었고, 현재는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별안간 유행입니다.😆 사실 쇼펜하우어는 좀 애매한(?) 철학자인데 저는 쇼펜하우어가 대중적인 호환성(?)을 많이 가졌다고 보지는 않아서 현재의 유행이 굉장히 의외입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도 이같은 유행도 어느 유행이나 마찬가지로 “마케팅업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인스턴트식 인문학”도 역시 위 빙산 모형에서 수면위 빙산 조각 일부를 뜯어 모아놓은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이 보아도 인생에 있어서 그리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힘들겁니다.

통속 인문학과 영화의 만남

이러한 통속 인문학과 영화가 만나면 “재앙”이 되는데, 제 경험상 종종 이런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즉, 영화창작자(사실 문학분야에도 종종 일어납니다)가 인스턴트 인문학에 심취해서 작품을 만드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예술성과 상업성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놓치게 됩니다. 예술성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겠고 상업성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먼저 위와 같은 작품들은 창작자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어렵게” 보일려고 애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통상적인 대중 관객들은 “오 마이갓! 무지 어렵고 재미 드럽게 없는 예술영화야!!” 하고 외면합니다😂. 반대로 어느정도 지적인 관객이라면 작품이 가진 인스턴트 인공조미료적인 느낌을 쉽게 간파할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도 외면받습니다. 즉,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작품이 되버리는 것이죠. 영화창작자라면 이점도 주의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본론에서 좀 멀리 돌아갔는데, 다음시간에는 다시 러셀의 위 명언의 정체에 대해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다음편으로 가기 >>>

 

각주

[1] 여기서 “지성”을 흔히 “지식”으로 번역하는데, 저는 임의로 지식 대신 지성이란 단어로 바꾸었습니다. 지식이란 단어가 가진 선입견 때문에 여러분에게 혼동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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