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실존주의적 인생관 — 영화, 우리의 하루를 중심으로

아래는 제가 운영중인 유튜브 채널 @dayzart_official 구독자를 위해 작성된 쉬운 강좌 형식의 글입니다. 영화 예술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위 채널에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들어가며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하겠지만, 홍상수 감독 역시 자신의 작품을 통해 그의 인생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가장 최근 작품인 <우리의 하루>는 홍상수 감독이 자신의 사상을 보다 직접적으로 말로 친절하게 요약해서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작품들입니다(물론 이때문에 작품성은 떨어진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오늘은 주로 <우리의 하루>를 중심으로 홍상수 감독의 인생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가 홍상수 감독하고 함께 살아본적은 없기 때문에 물론 제가 이 분의 인생관을 정확히 알수는 없는 노릇이고, 따라서 이 글은 순전히 “영화 작품으로 드러난 홍상수 감독의 인생관”을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고 시작하자면, 홍상수 감독의 인생관은 “실존주의의 아형”이라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즉, 대강 말해서 홍상수 감독은 “실존주의자”입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하면 홍상수 감독은 “나를 무슨 무슨 주의 따위의 틀에 가두지 말게나”라고 정색하며 부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상당수 많은 실존주의자들은 자신을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면 다들 이런식으로 부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존주의 자체가 “틀에 가두지 않는 것”이라 제가 하는 식으로 실존주의의 틀에 가두면 당연히 그들은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ㅋㅋ

어쨌든 홍상수 감독의 생각을 알려면 그냥 실존주의를 알면 해결이 됩니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실존주의에 대해 쉽고 간략하게 설명하고, 이를 홍상수의 영화 “우리의 하루”와 비교를 하는 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사실 “실존주의”라는 철학 사상은 여러 사상가(철학자, 문학가, 예술가 등등)들이 재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를 뭉뚱그려 실존주의라는 용어로 부르는 것이라 실존주의를 한마디로 딱 정의할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실존주의에 대해 해박하게 잘 아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이하의 설명에 부정확하거나 비약이 있을수도 있지만, 이 글의 목적이 무슨 실존주의 철학 박사님을 양성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실존주의에 빗대어 홍상수 감독의 인생관을 살펴보기 위한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거라 믿습니다.

실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계상황”, “실존적 고독”, “실존적 자각”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이들 개념의 쉬운 이해를 위해 아래와 같은 가상의 이야기를 제가 만들어 봤습니다.


맨날 트위터로 관종짓을 하던 일론 머스크가 어느날 새로운 여성을 만나 장가를 갑니다. 이 여성은 유니세프에서 일하는 온화한 여성인데, 일론은 이 분의 온화함에 감화가 되어 완전히 새 사람이 됩니다. 한마디로 개과천선을 하게 된거죠.ㅋ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일론 머스크 재단을 설립하고, 매일 노숙자 쉼터에 가서 봉사활동을 합니다. 아프리카에 말라리아 백신을 사라고 거액의 돈도 기부합니다. 그리고 과학에만 몰두했던 지난날을 반성하며 종교도 갖는데, 통크게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를 세트로 전부 믿습니다.

이렇게 봉사의 나날을 살아가던 어느날 기침을 심하게 하여 병원에 방문합니다. 진단 결과가 나왔는데, 세상에!! 폐암 4기가 아니겠어요? 의사는 한달안에 죽을테니 각오 단단히 하라고 일론에게 당부를 합니다. 절망한 일론은 병원에 입원합니다. 바로 일론에게 인생에 있어서의 “한계상황”이 닥친겁니다. 그런데 이때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온화한 새 와이프가 정말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슬퍼하는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병원에는 날마다 자신이 도와줬던 노숙자들의 병문안 행렬이 이어집니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은 “일론 아저씨 덕분에 이제 말라리아가 무섭지 않아요”라며 따뜻한 편지를 보냅니다.

악플만 가득하던 트위터는 일론의 건강을 비는 사람들의 사랑스러운 댓글들로 가득차고, 프란치스코 교황도 달라이 라마도, 그리고 이슬람교 지도자 압둘 만수르(가명)도 모두 일심동체가 되어 일론의 건강을 빌어줍니다.

비록 일론은 죽겠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속에서 그는 진정 자신의 인생이 의미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죠. 그렇게 흐뭇해하며 스르르 홀로 잠이 들다 문득 새벽에 깨어난 일론은 갑자기 극도의 고독감을 느낍니다!

이 고독감은 세상으로 부터 내가 완전히 분리된 것 같은 기분인데, 이것이 바로 “실존적 고독”이라는 것입니다. 저승길에 돈과 명예를 싸들고 갈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함께 하지 못합니다. 누구나 죽음은 오로지 홀로 외로히 맞이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잠시 슬퍼하겠지만 이내 곧 아무일 없었던것처럼 예전처럼 잘 돌아갈 것입니다. 일론은 여기서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완전히 격리된 것 만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그렇게 실존적 고독에 쩔어가는 순간! 갑자기 병실문을 박차고 누군가 들어옵니다! 새벽 부터 누구지 의아해하던 일론은 들어온 사람이 자신의 주치의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역시.. 새벽부터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아침형 인간이라 그 힘들다는 의대를 간거군. 역시 의느님들은 뭐가 달라도 달라” 일론이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그리고 의사보고 새벽부터 왜 왔냐고 정색을 하며 추궁합니다.

“당신은 폐암 4기가 아니오. 오진이었고 사실은 역류성 식도염이오. 당장 퇴원하도록 하시오!”. 의사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일론은 오진이래면서 당당한 의사의 태도를 보고 약간 어이없었지만, 어쨌든 살았다는 기쁨에 순순히 퇴원을 합니다. 진실은 암이 아니고 평소 밤늦게까지 군것질을 하고 그대로 누워서 잠을 자니 역류된 소화액이 식도를 자극하여 기침이 나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일론처럼 고생할수 있으니 여러분은 최소한 취침 1시간전에는 무언가를 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론도 이제 밤중에 군것질을 하지 말아야 겠다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번개같은 깨달음이 그의 머리를 탁 칩니다.

아! 사랑도 종교도 공익도 봉사활동도 다 무의미하구나! 나에게 주어진 의미따위는 없는거구나! 이 세상은 그냥 내 꼴리는대로 살면 그만인 것이었구나!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거구나! 일론의 이 깨달음이 바로 그 유명한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했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입니다. 쉽게 말해 나의 존재에 먼저 주어진 인생의 의미같은것은 정해진바 없다는 것이죠. 일론은 비로소 “실존적 자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실존적 자각을 한 일론은 그동안의 봉사생활을 전부 청산하고, 종교도 모두 버리고, 온화한 와이프와도 이혼하고  다시 테슬라 CEO로 복귀합니다. 그리고 예전처럼 트위터 관종질을 하며 잘먹고 잘산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우리의 하루>에서 시인 기주봉과 시인을 동경하는 젊은 남자는 인생의 “진짜”에 대해 대화를 합니다. 바로 이어서 감독 지망생 젊은 여자가 사온 무알콜 맥주를 먹습니다. 기주봉은 무알콜 맥주를 마시며 “진짜 맥주”같다고 여러번 강조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진짜 맥주와 가짜 맥주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객관적인 기준에 따르면 무알콜 맥주는 맥주가 아닙니다. 주세법상 주류가 아니라 음료로 취급되지요. 맥주라는 술의 본질은 “알콜”에 있기 때문에 본질이 빠진 무알콜 맥주는 가짜 맥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주봉은 이것을 진짜 맥주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세상에는 “객관적인 의미”란 것은 없고 개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의미”란 것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즉, 실존주의가 말하는 “내가 만들어가는 의미” 혹은 “존재에 앞서는 객관적 진리의 부정”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비록 객관적으로는 맥주가 아니지만, 술을 끊은 기주봉에게 있어서는 맥주맛이라도 난다면 그것도 진짜 맥주가 될수 있는것이지요.

기주봉은 젊은 남자에게 세상과 비겁하게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누차 강조합니다. 이것은 실존주의에서의 “실존적 자각”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책에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홍상수 감독이 의도한 “책”의 의미가 분명치 않은데, “객관적 진리”를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문자 그대로 “책(문자적 지식)”자체를  의미할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볼때 아마도 홍상수 감독은 “무의식”적으로 후자에 끌렸던 것 같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몇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이 부분은 항을 나눠 뒤에서 다시 살피겠습니다.

어쨌든 기주봉은 젊은 남자에게 책을 보고 무언가 미리 정해놓지 말고 일단 세상에 뛰어들라고 촉구합니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개인의 실존에 앞서는 의미는 없으므로 미리 삶의 의미를 — 특히나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 자신의 삶의 의미로서 정해 놓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뛰어들어 실존주의가 말하는 “한계상황”을 직접 경험해야만 위에서 말한 실존적 자각을 할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홍상수 감독이 그의 영화에서 보여준 인생관은 전형적인 실존주의 인생관과 거의 흡사합니다. 따라서 유달리 특별한 부분은 없다고 말할수도 있겠습니다.

실존주의의 문제점

홍상수 감독의 실존주의적인 인생관에는 물론 실존주의 철학이 가진 문제들이 따라오게 됩니다. 여러 문제들이 있겠는데, 여기서는 “인생관”의 문제로 분야를 좁히고, 그중에서도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딱 한가지 문제만 간단히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실존주의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그럴듯하고 나름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해결” 부분에 있어서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해가며 살라는 말이냐?”에는 사실 실존주의는 제대로 명확한 답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이것은 모든 실존주의 사상가들을 살피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러이러하게 살아라”라고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답을 제시하게 된다면 그 답이 새로운 의미와 규칙이 되버릴 것이고 결국에는 실존주의가 아닌게 되버립니다. 따라서 상당수 실존주의자들이 시작은 거창한데, 끝을 두루뭉술하게 흐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뭐라 뭐라 나름의 끝을 제시하여도 결국에 그 모든것들이 실질적으로는 “너가 알아서 그냥 잘 살아야지 뭐 어쩌겠어” 로 대강 귀결됩니다.😆

그래서 유명한 실존주의자들의 실제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 모두 대단히 의미있는 삶을 살았기에, 말로는 실존에 앞서는 의미란 것은 없다고 어두침침하게 이야기들을 하시는데, 의미가 앞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분명하게 구별이 잘되지는 않아 보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분명 자신의 이론과 실제의 삶이 애매하고 혼잡하게 마구 뒤섞여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인간이란 선행하는 의미가 없이는 살아가는것이 불가능한 존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실존주의자 알베르 카뮈와 사르트르는 여자도 많이 만나고 맛집도 많이 가고 여행도 많이 가고 세상의 존경을 받으며 왕성한 활동을 하시며 신이나게 사셨습니다. 이 분들이 정말로 실존에 앞서는 의미가 없다고 굳게 믿으시며 살아가셨을지, 혹시 자기도 모르게 의미가 새록새록 자신의 실존 앞으로 전진하지는 않았을지 저는 약간 의심이 갑니다.😆 홍상수 감독에게도 동일하게, 이 실존주의의 문제점이 적용될수 있겠습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모두 “문제제기” 단계에 그칩니다. 그리고 답은 애매하게 흐리지요. 사실 본 작품에서 말하는 그의 인생관은 특별나게 실존주의 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알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입니다. 요컨대, 약간의 용두사미적인 느낌이나 혹은 식상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 역시, 사랑을 갈구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도 신나게 만들면서 대단한 의미들을 만들면서 살고 있습니다.

책이냐 경험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위에서 말했듯이 시인 기주봉은 책에는 답이 없다고 젊은 남자에게 말합니다. 여기서 책이 “객관적 진리”를 상징하는 것일수도 있고 말 그대로 “책(언어적 진리)”을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영화상에서는 논리적으로는 전자를 의미해야 맞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모든 지식들, 다시 말해 실존주의적인 지식들은 이미 시중의 책들에 아주 잘 나와있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ㅋㅋ 그런데 저는 이 영화 뿐만 아니라 홍상수 감독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이는 이 분의 성향과 사상등을 종합해 볼때 홍상수 감독이 문자 그대로 “책” 자체를 의미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실존적 자각을 위해서 책은 소용이 없고 직접 온몸으로 세상에 뛰어드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이 “책을 버려라”라는 생각은 많은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정말로 책을 읽지 말라”는 주장과, 정반대로 “사실은 책을 읽지 말라는 소리가 아닌” 주장으로 나뉩니다. 제 개인적으로 볼때, 전자의 예로서는 예수 그리스도, 노자등을 들수 있겠고, 후자의 예로는 석가모니, 비트겐슈타인등을 들수 있을것 같습니다. 두 경우 모두 겉보기에는 “책을 버려라”라고 주장이 되어서 사실 듣는이를 햇갈리게 만듭니다.

양 주장중 무엇이 맞는지 짧게 검토해본다면, 저는 홍상수 감독의 생각과는 다르게, 실존적 자각을 위해 책은 “필수적”인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해 평범한 보통사람이 오로지 개인의 경험만으로 실존적 자각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심지어 홍상수 감독과 같은 발상은 굉장히 “위험한 사고 방식”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저런 태도는 대게 어떤 신비주의적인 사상에 빠지게 만들어 홍상수 감독이 그렇게나 경계하였던 또다른 가짜속에 갖혀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이것은 실증 사례를 쉽게 찾을수도 있는 문제인데, 먼저 대표적인 실존주의자들, 이를 테면 알베르 카뮈, 사르트르는 책을 무지하게 많이 읽은 사람들입니다. 홍상수 감독 본인 역시 독서가로 세간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책을 읽지 않고 경험만으로 실존적 자각에 이를수 있다면 6.25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경험했던 대한민국 국민들 대부분은 실존주의자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테러위협에 매일 시달리는 이스라엘은 진작에 유대교 원리주의 국가에서 탈피했을겁니다.

요컨대, 일부 특출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실존적 자각을 위해서는 경험과 책이 모두 필수라 하겠습니다.

실존주의 좀더 알아보기

실존주의 사상 혹은 홍상수 감독이 그의 영화에서 표현한 인생관에 대해서 아주 깊은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철학으로서의 실존주의에 대해 좀더 알아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아래의 책들 몇권을 소개합니다. 위에 있을수록 쉬운책입니다.

1.인간에 대하여 (마광수 저)

이 책은 국문학자 마광수 교수가 쓴책인데, 이 책의 “인간은 실존적 인식을 통해 거듭날수 있다”라는 파트가 제가 보았던 실존주의에 대한 문헌중 가장 쉽고 간결하게 설명된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마광수 교수의 사상과 홍상수 감독의 사상이 대단히 비슷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홍상수 감독을 많이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얘 마광수 교수의 책들을 살펴 보시는 것도 좋을듯 싶습니다. 공통점을 아주 많이 발견할것입니다. 홍상수 감독이 영화에서 맨날 말하는 “솔직하자” 뭐 이런것들도 전부 마광수 교수가 항상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참고로 마광수 교수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은 나무위키의 마광수 항목을 살펴보신후에, 제가 쓴 마광수 교수 관련 글 두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마광수글 1 링크  , 마광수글 2 링크

2.실존주의자로 사는 법

영국의 중견 철학자가 쓴 아주 쉬운 실존주의 입문서입니다.

3.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경희대 철학과 최성호 교수가 쓴 실존주의 입문서로서, 잘 쓰여진 좋은 책입니다. 위 책보다는 좀더 어렵습니다. 사실 이 책을 읽기전에 난이도가 더 높지만 아래의 “시지프 신화”를 먼저 읽고 나서 이 책을 읽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책이 아래책의 이해를 도울것입니다.

4.시지프 신화(알베르 카뮈)  

실존주의 문학가 알베르 카뮈가 자신의 실존주의 사상에 대해 직접 소개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분도 자신을 실존주의자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였다는군요.ㅋㅋ

5.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사르트르)

이 책이 실존주의 입문서로 권장이 되는 것을 봤는데, 이 책은 입문서로서는 부적합합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아마 문장 하나하나는 쉬운데 정작 내용은 이해가 안되는 불상사가 생길겁니다.ㅋ 왜냐하면 이 책은 사르트르가 자신의 철학을 비판하는 자들을 재비판하기 위해 했던 강의를 묶어놓은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가 어떻게 비판받는지 대충 알고 있어야지 이해를 할수 있는 책입니다.

끝으로

앞서 말했듯이 실존주의 철학은 사상가마다 조금씩 모습이 다르고, 제가 실존주의에 대해 해박하게 잘 아는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글의 내용에 약간의 비약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쉬운 강좌형식의 글을 감안하더라도 치명적이다 싶은 오류를 발견하신분은 아래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론

2024.1.5.추가사항:

원문의 “무알콜맥주”와 관련된 부분에서 이를 위 영상속의 “조니워커 양주”와 관련을 지어 검토를 했어야 했는데 양주를 누락 하여 결과적으로 해당 부분의 설명이 미흡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이 부분을 보완하겠습니다.

위 영상은 작품의 마지막 부분인데 젊은 남녀가 떠난후 시인 기주봉이 홀로 옥상에 올라가 조니워커 양주를 마시는 장면입니다. 남녀와의 대화중에서는 금주중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시인은 “진짜 술”을 마시게 됩니다. 이 부분을 “가짜 술”인 무알콜 맥주와 관련하여 어떻게 해석할지가 문제됩니다. 해석은 두가지 방식으로 할수 있습니다.

첫번째 방식은, 원문에서 무알콜 맥주를 “상대적 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던 저의 설명은 틀린것이고(참고로 이 부분이 틀리더라도 나머지 부분에는 영향이 없습니다) 홍상수 감독이 정말로 의도한바는 무알콜 맥주를 진짜 술이라고 치켜세우며 마셨던 기주봉의 모습과 영화 마지막에서 결국 진짜 술을 마시는 장면을 대비하여 보여줌으로서, 기주봉이 가진 위선 혹은 불완전한 면을 부각시켜 준것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에 따르게 되면 본 “무알콜맥주-양주” 씬의 관계는 통상적이고 흔한 연출이 됩니다.

두번째 방식은, 무알콜 맥주 부분은 원문에서의 제 설명과 같이 “상대적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고, 양주 부분은 원문에서의 “실존주의의 문제점”이라는 제목하에 설명했던 “절대적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는 방법입니다. 이에 따르면 영화속 기주봉으로 표현되는 홍상수 감독은 머리로는 실존앞에 선행되는 객관적 의미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주봉이 영화 마지막에서 결국에는 양주(객관적 진리)를 먹었듯이 본인도 왠지 모르게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나 삶의 의미를 자꾸만 지향하고 바라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됩니다. 원문을 작성할 당시에 저는 홍상수 감독이 실존주의가 갖는 문제점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판단하였으나, 이 두번째 방식이 옳다면 그는 이같은 문제점들을 인지 하고 있고 그것을 영화적으로 표현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이 경우는 통상적인 연출이 아니라 난해한 철학적 관념들을 술이라는 매개체로 표현한 상당히 수준높은 연출이 됩니다.

저는 이 두번째 방식이 옳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무알콜 맥주씬에서 등장인물들은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진짜”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말합니다. 본 장면이 중요하다는것을 선언하듯이 말이죠. 이렇게 장치해놓고서 그냥 기주봉의 위선을 표현하려고 했을뿐이란 것은 어색한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애당초 영화속에서 기주봉이란 캐릭터는 그렇게 부정적인 캐릭터는 아닙니다. 홍상수 감독의 여러 작품들속에서 많은 분들이 “위선”을 발견하시곤 하는데, 저는 위선이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위선을 비판하거나 하려는 의도가 없고 그의 작품에서 위선은 일종의 배경처럼 흘러갈뿐입니다.

둘째로, 그간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작품에서 어떤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진리나 의미(종교도 여기에 포함됩니다)에 대해 갈구하거나 암시하는 듯한 표현을 여러 차례 했었습니다. 즉, 그가 비록 이런 의미들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무언가 아쉽고 왠지 마음이 끌린다는 것을 표현했다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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